비 오는 날에 대한 단상
비가 오는 날이면 유난히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언어의 정원>. 아마 <너의 이름은>이라는 작품으로 더 유명한 감독일 테지. 46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덕에 비가 오는 날 생각이 날 때마다 몇 번인가 돌려보았던 기억이 있다.
비 오는 신주쿠 공원을 배경으로 이야기는 흘러간다. 구두 디자이너를 꿈꾸는 학생 ‘다카오’와 ‘유키노’라는 여자는 우연히 공원에서 만나게 된다. 비 오는 날마다 그들의 만남은 이어지고 다카오는 유키노를 위해 구두를 만들어주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장마가 끝나갈 무렵 그들 사이에는 말하지 못할 무언의 감정이 남게 된다.
비 오는 날의 우연한 만남과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 현실의 장마는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지만 어쩐지 영화에서만큼은 문득 로맨틱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언제나 영화의 말미에 흘러나오는 하타 모토히로의 ‘rain’을 두고두고 돌려 들었다. 그게 <언어의 정원>을 보내주는 나만의 방식이었다. 일본어라 가사를 제대로 알지는 못하지만 영화가 끝나며 흘러나오던 노래의 감성을 잊지 못해 가끔 비가 오는 날이면 플레이리스트에서 노래를 찾아 듣기도 했다. 음악의 힘이란 정말 신비했다. 순식간에 그 감각을 그대로 재현해내니 말이다.
비가 오는 날엔 항상 비가 왔던 날을 떠올린다. 기억은 기억을 덧입히며 존재한다. 다행인 걸까. 비 오는 예전 어느 날엔 울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데 이제는 다 희미한 걸 보면 그 후로 비 오는 날마다 많은 기억을 쌓았나 보다. 가장 최근의 기억은 서점에 다녀왔던 것. 책을 구매할 생각도 있었지만 구매가 목적이었다기보다는 인상적인 문장을 발견하기 위함이었다. 누군가의 신선한 문장을 보면 글을 계속 써 내려갈 힘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비롯된 발걸음이라고나 할까.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뚫고 지하에 위치한 서점으로 내려가는 길은 설렘을 동반했다. 내가 여기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하지만 큰 출판사에서 출판한 유명한 작가들의 책들을 한참 훑어보는데도 내가 원했던 짜릿함은 오질 않았다. 유려한 문장이었지만 그건 그들만의 것이었다. 내가 흉내 낸다고 한들 흉내 낼 수도 없는 것이었고 똑같이 따라 한다고 해도 내 것처럼 느껴지지 않을 문장들이었다. 서점에 온 이유를 상실한 나는 금방 흥분이 가셨다. 서점에서 돌아오는 길. 어쩌면 글을 계속 써 내려갈 힘은 다른 작가의 책 속이 아니라 내 안에 있을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번 비가 오는 날에 떠올릴 기억은 새로운 깨달음의 순간이리라.
기억은 어떠한 것을 매개로 쉽게 떠오른다. 비가 오는 날엔 비가 왔던 날을 떠올리는 나처럼 누군가의 생각도 저 멀리 어딘가까지 날아가겠지. 빗소리를 듣는 오늘도 <언어의 정원>을, 그리고 비 오던 지나간 날들을 추억했다. 그래서 비에 대한 글을 써버리기로 마음먹은 건지도 모른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짧은 기억. 당신의 기억은 오늘 무엇을 추억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