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 이야기 에필로그
좋아하는 노래가 생기면 그 노래만 두고두고 돌려 듣는 버릇이 있다. 그렇게 해서 잃게 된 노래들이 수백 곡. 수십 번 재생된 노래들에게선 어쩐지 처음 들을 때의 그 감흥을 찾을 수 없었다. 한 곡만 돌려 듣지 않았다면 나는 좀 더 그 노래들을 오랫동안 즐길 수 있었을 텐데. 이럴 때면 뭐든 적당하지 못한 나 자신이 과하게 느껴졌다.
언젠가 수박에 비유하며 ‘적당함’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때의 나는 적당하지 않은 우리도 괜찮다며 도를 터득한 사람 마냥 굴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 놓고 이제 와서 적당하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운 고백이라니. 맙소사. 최악이다. 하지만 언제나 글은 자기반성적인 속성을 가지는 투명한 매체이니까. 정말 솔직히 말해보자면 가끔 난 뭐든 적당하지 못한 나 자신을 탓하며 산다. 적당하지 못해서 잃어버린 것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언젠가 운동을 하면 삶이 바뀐다는 누군가의 인터뷰를 보았다. 그럴듯하고 진리같이 들리는 말이었다. 하지만 운동에 치여 일상이 없던 시절도 내 삶은 그리 바뀐 것 같지 않았다. 친구와 함께 헬스장에 다니던 나는 그 몹쓸 승부욕 탓에 항상 러닝머신을 더 빨리 달리기 일쑤였고 헬스장에 가기도 전부터 한 시간씩 먼저 운동을 하기도 했다. 그 시절 운동은 내게 스트레스이자 하루도 빠짐없이 반드시 수행해야만 하는 퀘스트 같은 것이었다. 운동은 내게 취미도, 자기 계발도 될 수 없었다.
이 모든 건 내 지긋지긋한 기질에 기인한 것이다. 한평생을 이렇게 살아온 나는 뭐든 여유를 가지고 적당한 템포로 해나가는 방법을 모른다. 하지만 이 적당하지 못한 성격 덕분에 나는 고등학교 때 성적우수반에 속했으며 미술을 시작한 지 2년 만에 한예종에 입학했고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인생을 즐길 수 있는 소소한 취미들은 잃었지만 스물일곱 인생의 소소한 성취들을 이뤘다. 하나씩 얻고 잃었으니 제로썸 게임이라고 봐도 되는 걸까.
요즘은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린다. 업을 목표로 하고 있으나 아직 기회가 닿지 않아 여전히 취미인 상태다. 하지만 취미라는 게 내가 그림을 즐기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아직은 프로가 되지 못했다는 뜻일 뿐. 퇴근 후 책상에 앉아 고개를 처박고 그림을 그릴 때면 파도가 휩쓸고 간 뒤 자리에 남은 모래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나만 이대로 영원히 정체되어 있을 것만 같은 기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몇 시간이고 계속 그림을 그린다. 적당하지 못한 내가 이 성격에 할 수 있는 건 뭐라도 꾸준히 하는 것 밖에 없기 때문에. 지금은 번번이 상업화 단계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말지만 그럼에도 언젠가는 되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기에. 결과가 좋으면 과정도 다 좋은 것이었다. 언젠가 목표한 것들이 다 이루어지면 그때는 나의 미운 성격도 품을 수 있게 되겠지. 적당하지 못한 나의 삶을 아끼게 될 수 있을 때까지. 나의 적당하지 않은 삶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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