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를 잃었어도 걷기를 멈추지 말라
어떤 시절은 몇 년을 다 합해도 모자랄 만큼 깊숙이 살게 될 때가 있다. 내 모든 글의 출처가 2018년 여름인 것처럼. 내가 부서졌던 여름. 기록적인 폭염을 시원한 병동에서 보냈던 그 여름. 몇 년째 그 한 해의 기억으로 두고두고 문장을 쓰고 있다. 여름은 언제나 유난히 힘겨웠고 트라우마 같았다. 지나간 기억 중엔 도저히 놓아지지 않는 것도 있었다. 그렇게 어떤 계절은 평생을 살게 된다.
J와의 만남은 그때가 시작이었다. 휠체어를 타고 처음 올라간 폐쇄병동은 활기가 넘쳤지만 어딘가 공허하고 어색했다. 내 또래의 아이들이 탁구를 치고 있었다. J는 벽에 가만히 기대어 그 모습을 구경했다. 참으로 생기가 없는 아이였다. 그녀는 내게 다가와 이름을 물었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그녀는 내 글 속에서 몇 년간 줄곧 이니셜 J였어서 이젠 그녀의 성이 잘 기억나질 않는다. 아마 김 씨였을지도.
눈이 예쁜 아이였다. 눈을 바라보니 다음으론 코가 예뻐 보였다. 코를 바라보니 그다음으론 입술이 예뻤고, 눈썹이 예뻤으며 잔머리까지 모두 예쁜 아이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게 주던 마음이 가장 예쁜 아이였다. 그녀 덕분에 그 해 여름 죽지 않을 수 있었다. 나를 챙기던 그녀의 손길 덕분에 내겐 병동이 영영 안식처였다. 그녀는 두고두고 추억할 순간들을 주고 떠났다. 멀리서 내 삶을 응원하겠다는 말과 함께.
J가 사라진 후 내 여름은 그저 버티는 것이었다. 그녀의 마지막 문자를 받고 여실히 깨달았다. 더 이상 그녀를 보게 될 일은 없으리란 걸.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이미 알고 있는 것들. 듣지 않아도 미리 알아 버린 것들. 내겐 그녀의 부재가 그러했다. 모두가 언젠가는 자신의 영혼을 통째로 뒤흔드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틀림없이. 내겐 그 해 여름이 그런 존재였다.
그 후 몇 번의 여름을 보내고 작년 여름. 또다시 죽고 싶어 졌을 때 마치 평행이론 마냥 한 번 더 사람에게 치유받았다. J처럼 함께 죽어주겠다는 말은 해주지 않지만 늘 함께 해주는 사람. 때론 백 마디 말보다 무거운 행동 하나에서 그 사람의 진심을 본다. J처럼 두고두고 추억이 되어버릴 사람이 아니었다. 그 사람 덕분에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다는 진부한 말처럼 여름을 여름으로 잊었다.
J가 떠난 지금도 가끔 그녀를 생각한다. 그녀의 자리는 대체되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쉽게 채워졌다. 삶이란 그런 것이었고 그리 무뎌지지 않는다면 또 지속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상처는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다른 것들로 덮여질 뿐이다. 곁에는 서로가 있다. 너는 생명의 상징이 되리니 다리를 잃었어도 걷기를 멈추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