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진심은 그 자체로 충분히 애틋할지도
처음 병동에 들어왔을 때 짧은 단발머리를 귀엽게 묶고 탁구를 치던 아이를 기억한다. 열다섯 살이라던 S. 그 아이의 입을 통해 들었던 바깥 이야기들은 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던 것들이었다. 나의 열다섯은 그저 교우 관계로 고민하던 평범한 여중생의 삶이었는데 무엇이 그녀를 이 폐쇄병동까지 들어오게 만들었는지. 물론 나의 미래 역시 순탄하리란 보장은 없지만 열다섯 살 때부터 폐쇄병동에 들어와야 했을 정도의 아픔을 겪었다면 이 아이가 앞으로 살아가는 데에 있어 또 얼마나 많은 상처와 슬픔이 남아있을지. 앞이 아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는 매우 밝은 아이였다. 그녀는 형형색색의 고무줄로 머리를 묶는 재미에 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 역시도 종종 그녀에게 나의 긴 머리를 맡기곤 했다. 그녀는 조울증이라고 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온갖 아픈 사람들이 다 모여있는 곳이니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내가 우울증을 앓는 것처럼 그녀도 그냥 그런 무언가를 앓는 거였다. 그녀는 깨어있는 시간의 절반을 탁구를 치는 데에 쓰고 나머지 절반을 먹는 데에 쓰며 또 나머지 절반은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데 쓰는 듯싶었다.
S는 나와 J까지 합해서 우리는 영원한 세 자매라는 표현을 자주 했다. 나가서 꼭 보자는 둥 5년 뒤에 같이 술을 마시자는 둥. 가끔은 어른스럽다가도 어쩔 때 보면 또 딱 그 나이대의 순진함과 순수함을 갖고 있는 열다섯 살이었다. 그녀를 보며 나의 열다섯을 반추했다. 그녀만큼은 아니겠지만 나의 열다섯 역시 그리 녹록지는 않았던 것 같다.
열다섯인 대부분의 소녀들은 친구 관계에 예민하리라 생각한다. 나 역시 그랬었다. 싸우고 화해하고, 찢어지고 다시 붙고. 그러한 부질없는 것들의 반복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별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그때의 열 다섯들에게는 그런 것들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나 역시도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을 싸우고 화해하고 찢어지고 다시 뭉치는 그런 피곤한 일들로 보냈다.
내가 속한 무리는 언제나 홀수였다. 인원이 홀수면 언제나 남겨지는 누군가가 생긴다. 나는 그 잉여인간이 왜 항상 내가 되어야만 했는지 모르겠다. 늘 그랬다. 한 명이 남으면 그건 늘 나였다. 이건 정말이지 슬프고 아픈 고백이다. 태어나서 누군가에게 말해본 적도 없고 글로 써본 적조차 없는 기억들이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 이렇게 적어낼 수 있는 건, 더 이상 그런 기억 따위가 날 해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당시의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내게 관심이 없다면 내가 교우 관계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를 정도로 정말 밝게 지내던 시절이었다. 참으로 힘든 연극이었다. 힘들지만 그만둘 수 없는. 매일 내가 써야 했던 가면이었다. 그래서 열다섯 살에 받은 생일 편지들은 참으로 남다르다.
생일이 2월이라 내 생일은 항상 방학이었다. 나도 다른 친구들처럼 학기 중에 학교에서 생일 축하한다는 말이 너무나 듣고 싶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해서 12년 동안 그건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일 중 하나였다. 단 하루, 열다섯 살 때를 제외하면 말이다. 딱 한 번 중학교 2학년 때 생일에 등교를 한 적이 있었다. 그날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받았던 생일 축하 편지는 10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가지고 있다.
그냥 노트를 찢고 꾸며서 받은 편지들이었지만 내겐 그것들이 주는 의미가 상당했다. 평화, 그리고 무리의 일원이라는 안심. 그때 편지들을 받으면서 내가 느꼈던 감정들은 무려 그런 것들이었다. 때론 혼자가 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정말로 혼자는 아니구나. 그때의 난 내가 어떤 무리의 일원이라는 걸 고작 그런 노트 편지 몇 개로 실감했었다. 어린 나이였으니까.
열다섯의 S 역시 노트를 찢어 편지를 자주 써주었다. 그러고 보면 열다섯은 노트 편지를 좋아하는 나이인가 싶다. 그녀는 종종 노트를 찢어 편지를 써주다가 나중에는 교환일기를 쓰자고 했다. 참으로 귀여운 발상이었다. 나와 J는 S가 하자는 대로 노트에 교환일기를 몇 번 써주었지만 차마 오래 하진 못했다. 더 이상 그런 것들이 재미있게 느껴지는 나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열다섯에서 너무 멀어진 탓이었다. 하지만 그 후로도 S는 혼자서도 곧잘 노트에다 언니들에 대한 애정을 기록해서 주곤 했다.
우리는 병동에서 서로에게 편지를 자주 선물했다. 전자기기들을 사용할 수 없으니 저절로 책을 읽고 퍼즐을 맞추게 되었다. 퇴원 준비를 할 때 보니까 선물 받은 그림과 편지, 메모들이 한가득이었다. 제대로 된 편지지도 아닌, 노트를 엉성하게 찢어 적어 내려 간 편지들을 보니 열다섯에 받았던 생일 편지들이 떠올랐다. 어쩌면 진심은 예쁘게 포장되지 않은 투박한 상태 그대로일 때 더 깊숙하게 가 닿는 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