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바다의 얼굴

바다와 파도와 우울

by 윤사강

가을비는 오다 말다 하며 땅을 적시고 있었다. 이런 날에는 실내에서 가만히 바깥을 보는 게 좋았다. 비에 젖는 일이 나와는 무관하게 되는 것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가 오는 날엔 유난히 밖에 있는 날이 잦았다. 이상하게도 자꾸만 밖에서 비를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폭우 속에서 작은 우산 하나에 의지해 서점으로 가던 날, 주말을 맞아 아울렛을 방문하던 날, 연인의 손을 잡고 속초의 밤바다를 거닐던 날도.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비를 피하기 위해 걸음을 재촉해야만 했다.


그날은 숙소로부터 꽤나 멀리까지 걸었다. 밤의 바다는 낮의 그것과는 달라서 물의 색깔이 투명하지도 않았고 파도가 잔잔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으르렁거리는 파도가 자꾸 발길을 사로잡아 걸음을 돌릴 수가 없었다. 바다를 따라 하염없이 걷다 보니 결국에 비를 만났다. 비를 동반한 파도는 뭐가 되었든 삼킬 수 있을 것처럼 공격적으로 부서졌다. 밤바다의 실물은 실로 강력해서 사진을 찍어두지 않았다면 낮의 바다를 잊을 뻔했다.


밤바다를 정면으로 마주한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밤의 바다를 본 적도 없던 나는 우울을 묘사할 때마다 습관처럼 바다나 파도 따위의 단어를 빌려다 썼다. 속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커먼 바다를 보니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또 될 수 없던 시절의 막막함이 떠올랐다. 비바람이 치는 밤바다의 모습은 내가 아팠던 밤의 모습과 그대로 닮아 있었다. 빠른 속도로 플래시백이 일어났다. 그 속도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날 걸음을 재촉하며 파도 앞에서 아릿한 표정을 지었던 것도 같다.


비가 그치고 아침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바다는 다시 투명해졌다. 포악한 밤바다의 표정을 기억하는 이는 나와 연인뿐이었다. 전생처럼 아득한 기억을 가지고 우리는 막국수를 한 그릇씩 먹은 후에 서울로 돌아왔다. 눅눅하고 축축했던 바다의 습기는 금세 잊혀졌다. 일상이 그 자리를 대체했고 잠깐 보았던 밤바다의 기억은 속초 여행에서 더 이상 회자되지 않았다. 하지만 너울거리던 밤바다의 파도는 밤이면 종종 생각났다. 모래사장 위로 높게 쏟아지던 파도에 잠기는 꿈을 아주 가끔 꾸었다.


밤바다의 얼굴을 보고 난 뒤에도 여전히 우울을 바다와 파도에 비유한다. 가라앉으면 종국에는 죽게 되지만 파도에 몸을 맡기면 그런대로 바다에서도 잠기지 않을 수 있다. 누군가는 파도를 타기도 하겠지. 바다를 잘 다룰 수 있는 사람만이 바다에서 오래 살아남는다. 그리고 나는 부디 내가 오래 살아남을 수 있기를 바랐다. 밤바다의 폭력적인 표정을 보았어도 그것이 온화하게 빛나는 다음 날의 아침도 보았으니 시커먼 바다에 지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랐다.


이번 비가 그치고 나면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질 예정이었다. 옷장 밖으로 한 번도 나오지 못한 트렌치코트를 꺼낼 시간이다. 무더운 여름의 생을 내가 또 한 번 살아내다니. 바다에 가라앉지 않고 무사히 여름을 보냈다. 가을을 지나 겨울이 오고 앙상해질 때까지 또 살아남아야 한다. 바다는 잘 얼지 않는다. 어쩌면 이 계절의 순환 끝에는 그해의 여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 고단한 바다는 그해의 여름으로부터 흘러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맑고 청량하던 낮의 속초 바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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