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소녀의 정서와 감정은 영어공부 보다 존중받지 못했다
나는 매주 수요일 10시 심리상담을 받는다.
누군가 나의 감정을 물어봐주고 울어 준다는 것은 큰 위안이다.
상담을 받고 6개월쯤 되었을 때 나는 매주 수요일 아침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자각했다. 치료 선생님의 일정으로 치료 일자가 뒤로 밀린 것이다. 마치 연인과 약속했는데 아쉽게도 못 만나는 상황처럼 나는 아쉬웠다.
금요일에 보강 치료 수업이 있던 날이었다.
" 도연 씨는 영어를 잘하는 것 같던데.. 영어는 어떻게 배우게 된 것인가요? "
그 질문은 나를 초등학교 졸업을 할 무렵, 중학생이 막 돼야 할 그때로 나의 기억을 데려갔다.
내 의견 따윈 개나 줘버린 집안 분위기
6학년을 어찌어찌 졸업하고 중학교 배정을 받은 어느 날 엄마는 교복을 맞춰야 한다는 내 말에 교복을 맞출 필요가 없다고 말하셨다. 왜냐고 물으니 3월 말부터는 핀란드에 가서 3년을 살아야 한다고 대답하셨다.
아빠의 발령으로 외국에서 3년을 살아야 한 다는 말은 외국으로 떠나기 3~4개월 전에 통보받게 된 것이었다.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이며 내가 나름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일들이 다 소용없게 된 것처럼 느껴졌다. 늘 이런 식이었다. 예고 없이 더부살이를 해야 했고 갑자기 이사를 가야 했다. 이젠 느닷없이 해외로 가서 살아야 한다니 힘이 쭉 빠졌다. TV에 나오는 외국인들이 더빙을 해서 한국말을 할 줄 안다고 느끼는 아주 순수한 나한테 앞으로 엄청난 일들이 다가올 것을 직감했다. 엄마 아빠까지 모두 다 가는 것이고 아빠 회사차원에서 발령을 낸 것이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다만 내 생각 따위는 중요하지도 않고 심지어 물어봐야 대충 일어날 상황을 알려주는 방식의 소통은 나를 쓸모없는 잉여 인간처럼 느끼게 했다. 가라면 가고 먹으라면 먹고 자라면 자는 꼭두각시 인형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변화는 내게 큰 영향을 끼친 것 같다. 별 일이 없어도 갑자기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을 계속 주는 불안이 높아져 갔다.
여긴 어디? 난 누구?
해외로 이주해야 한다는 말을 너무 늦게 알아버린 탓에 친구들과도 충분한 이별의 시간을 갖지 못하고 난 생판 모르는 북유럽 핀란드로 부모님을 따라 이주하게 됐다. 이미 사택에 정해진 사택에 도착해 짐을 풀기 시작하면서 난 생각했다. ' 아.. 이게 엄마가 말한 성공인 건가? 그 잘난 신분 상승이라는 것인가? ' 처음 살아보는 50평 때 아파트에 방도 여러 개이고 주방도 현대식이었다. 마치 타이머신을 타고 먼 과거에서 갑자기 미래로 와버려서 난 그 문화적 충격에 할 말을 잃었다. 분명 좋다고 느꼈어야 했는데 나는 불편했다. 부시맨에게 콜라병이 떨어진 것처럼 당황스럽고 물음표의 연속이었다.
내 집에서 밖에 나갈 때도 문이 저절로 잠기는 문이기에 열쇠를 꼭 가지고 나가야 했고, 쓰레기는 정해진 장소까지 열쇠를 들고 나와 버려야 했으며 오후 5시 이후로는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아서 필요한 물품은 그전에 다 사다 놓아야 했다. 지나가면 대낮에도 길거리에는 술 취한 알코올 중독자들이 있어서 무서웠다. 모든 게 하루아침에 연극 무대처럼 배경이 바뀌고 난 그 무대에 강제적으로 어떻게든 적응하고 살아야 했다.
어쩌다 헬싱키 국제 학교 학생
우리나라보다 엄청 선진국이었던 헬싱키에서의 생활은 모든 게 신기했고 신박했지만 불편했다. 정신 바짝 차리고 긴장하면서 살아야 했다. 아빠는 핀란드 도착 후 3주 만에 출근을 하셨고 나도 아빠가 출근하시면서 학교 앞에 내려졌다. 한국에서 중학생 입학할 나이였다 해도 80년대 때는 중학교 입학을 해야 알파벳을 배우기 시작하는 시절이었다. 나를 강하게 키우고 싶으셨던 것인지 회사가 바쁘셨던 것인지 알파벳 순서도 헷갈리던 내게 혼자 학교 안에 들어가서 반을 찾아가는 것은 엄청난 미션이었다. 위축되고 긴장되지만 도와줄 누군가도 없기에 어떻게든 내가 정신을 차리고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에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또 처해졌다.
우물쭈물 학교 안으로 들어가 두리번거리니 금발머리에 파란 눈의 아이들이 뭐라 뭐라 말을 걸어왔다. 나는 나와 비슷한 머리색과 눈동자 색을 가진 아이들이 있나 찾기 바빴다. 다행히 나를 알아보고 ESL선생님께서 반을 찾고 사물함 위치를 알려 주셨고 나는 그 후부터 아무도 없는 빈교실에 ESL선생님과 단둘이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알파벳을 열심히 외우던 학생이었는데 거기선 꼬부랑글씨가 길게 쓰여있는 문장을 말하는 공부를 하게 됐다. Mrs. 야오이야이넨은 미국 분이셨지만 핀란드 남편과 국제결혼을 하셨다고 나중에 알게 됐다. 가르치는 주 과목은 음악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셨지만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나라의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도 병행하셨다. 선생님과 전혀 소통이 되지 않았지만 난 마치 엄마를 졸졸 쫓아다니듯 Mrs. 야오이야이넨 꽁부니에 붙어 다녔다.
수학이나 음악 그리고 체육시간에는 영어가 중요한 과목이 아니기 때문에 ESL수업 대신 정규 수업을 들어가곤 했다. ESL 클래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다가 원반에 들어가서 다시 적응하고 섞이기란 14살 사춘기 소녀에게 스트레스였다. 그래도 나는 이를 악물고 수학시간에는 수학을 풀었고, 음악시간에는 악보를 보며 악기를 연주하였으다. 체육시간에는 누구보다 빠르게 뛰고 눈치껏 패스를 해야 했다. 누구도 내게 넌 바보냐고 묻거나 취급한 사람도 없는데 나 혼자 다른 애들이 나를 바보로 볼 것 같아서 영어가 비교적 덜 필요한 과목에서 나는 1등을 하려고 노력했다. 나 혼자의 싸움이자 자존심이었다.
한국에 있었으면 내 맘대로 사춘기를 표현하고 겪었을 시기에 나는 영어를 꼭 배워야 한다는 강박으로 하루하루를 힘들게 보냈다. 핀란드살이 6개월쯤 됐을 때 나는 진지하게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한국에 돌아가서 혼자 중학교를 다니고 있겠노라고. 내가 왜 언어의 장벽 때문에 아이들하고 소통도 못하고 바보처럼 여기서 지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언제나 그랬듯 내 의견은 존중받지 못했다. 엄마 아빠로서도 중학생인 아이를 혼자 어떻게 내버려 두냐고 생각하셨겠지만 난 어차피 한국에서도 혼자였다. 혼자 밥을 먹고 혼자 학교 가고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으니까 말이다.
동양이라고 놀리던 핀란드 남자아이
우리 반에 핀란드 남자아이가 있었는데 다이하드 영화감독의 조카라고 소문이 파다했다. 하지만 그게 진실인지 아닌지 난 관심도 없었다. 근데 나만 보면 매일 검지손가락을 자기 눈에 갔다 대고 눈꼬리를 찍 위로 늘려서 나를 보고 뭐라 뭐라 놀렸다. 그런 일이 반복되지만 난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하다가 아빠에게 물었다. 나를 놀리지 말라고 어떻게 영어로 말하냐고. 너무 길어서 말할 자신이 없어서 사전을 찾아가며 종이에 써서 학교에 갔다. 놀릴 때마다 그 쪽지를 그 남자아이한테 보여주었지만 놀림은 계속됐다. 난 속상한데 키득키득 되는 그 녀석이 난 너무 싫었다. 그렇게 6~7개월을 매일같이 버텼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이 벌어졌다.
ESL클래스를 마치고 정규 수업을 들어가려고 사물함에서 교과서를 챙기고 있는데 문제의 그 아이가 내게 와서 또 똑같은 방식으로 나를 놀려댔다. 나는 그 순간 내가 아닌 듯했다. 있는 힘껏 오른손으로 그 아이 뺨을 냅다 갈긴 것이다. 사물함 앞 학생 휴게실에 있던 아이들은 모두 조용해지고 그 아이와 내게 시선이 집중이 됐다. 그리고 우린 교장 선생님께 불러가게 되었고 그 아이는 교장 선생님께 약이 오른 지 자기 할 말을 청산 유슈처럼 해댔다. 그런데 나는 쪽지만 보여줄 뿐 어떠한 항변도 못했다. 지금 같았으면 화가 나서 한국말로라도 상황을 이야기했을 것 같지만 그 당시 나는 그렇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그러다가 분위기가 내게 분리하게 흘러가는 것 같아서 난 학교 전화를 빌려 아빠한테 전화를 했다. 결국 그날 오후 우리 엄마와 아빠는 교장 선생님의 호출을 받고 학교에 오셨다.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던 아이가 이런 일을 벌일 줄이야 하면서 적잖은 충격을 받으신 것 같았다. 하지만 아빠는 교장 선생님께 지속된 놀림으로 아이가 계속 힘들어했다고 말했고 교장 선생님은 다행히 상황을 들으시고는 서로 사과로 그 일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당시 미국 학교에서는 폭력은 있을 수 없는 큰 일이었지만 국제학교인 만큼 다양한 국적을 가진 학생이 모여서 공부하는 만큼 인종 차별 또한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판단을 하셨기 때문이다. 그다음부터 그 아이는 나를 더 이상 놀리지 않았지만 학교에 나는 무서운 동양 여자아이로 소문이 났다.
엄마 아빠에게는 이 정도 사는 것도 성공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었겠지만 알파벳 순서도 어렴풋이 알았던 내게는 부모님의 결정에 좌지우지되는 내 삶이 너무 억울했다. 빨리 아빠의 해외파견 임기가 끝나서 다시 한국에 갈 날만 기다렸다. 나의 사춘기는 낯선 환경 그리고 영어에 대한 압박 등으로 티도 못 내고 조용히 지내야 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 억울함과 해소되지 않은 많은 감정들이 쌓여만 갔다.
" 많이 도연씨가 힘들었겠군요. 사춘기인 데다가 말도 안 통하는데.. "
" 부모님은 영어를 그때 배운 게 아니냐면서 좋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시죠. 하지만 전 다릅니다. 영어를 못하더라도 내가 있고 싶은 곳에 내가 있고 싶은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지내는 게 더 소중했을 시기니까요."
" 영어를 잘해서 이득을 본 점도 많을 것 같은데. 아닌가요? "
" 평양 감사가 암무리 좋다고 해도 내가 싫으면 못하는 법이라 했습니다. 이득을 본 적도 있었겠지만 저는 그때 얻은 이득보다 더 많은 걸 잃었다고 생각합니다. "
" 자.. 오늘은 여기까지 수업하겠습니다. " 상담 수업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때 영어를 배우게 돼서 내가 좋은 직장에
취업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부모님은 말씀하셨다.
나의 자존감이나 정서는 상처받고 있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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