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마시는 남자랑은 절대 결혼하지 않을 거야
아빠는 법 없이도 살 사람처럼 보였으나
술만 먹으면 다른 사람이 되었다.
" 도연씨가 참 힘들었겠네요. 아직도 선명하게 꿈을 꾸고 기억한다니...."
" 어린 시절 더 기억나는 일은 없나요? "
" 기억나요. 늦깎이 대학생이 된 저희 아빠는 술을 좋아하셨어요. 아빠가 술을 많이 먹고 오는 날에는 전쟁터 갔았어요."
"그때 감정이 어땠나요? "
" 이 세상에 술이 다 없어 졌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고 아빠는 철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엄마가 혼자서 힘들게 돈을 버는데 아빠는 술만 먹고 다니는 것 같았어요. "
대학생이 된 아빠
드디어 아빠가 대학생이 되고 4년 장학생에도 선발되었다. 그날 우리 세 식구는 동네 어귀에 있는 자장면 집에서 자장면을 먹었다. 평소에는 구경도 할 수 없었던 맛있는 음식에 난 그날 우리 집에 좋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동물적인 감각으로 감지했다. 엄마는 대학교 4년만 잘 버티면 아빠도 좋은 직장에 취업을 하실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더욱더 열심히 일하셨다.
대학생이 된 아빠는 공부에서 해방이 된 듯 농활도 가고 MT도 갔다. 물론 나를 데리고 학교에서 하는 활동에 참여하셨다. 아빠와 같은 학번 동기들은 거의 다 아빠보다 4~5살 어렸다. 그래도 아빠는 성격이 외향적이고 그래서인지 동생 같은 동기들과 친하게 지냈고 스터디 그룹도 만들어서 하곤 그랬다. 문제는 그 모든 걸 나와 함께 했다는 것이다. 아빠가 강의 시간에 교실에 들어가면 난 아빠 동기들 젊은 아저씨나 아줌마 들과 함께 있어야 했다. 기다리면서 컵차기도 지겹게 보고 여름방학엔 아빠가 다니는 대학교 도서관에 같이 가서 8시간씩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 물론 나는 색칠공부나 동화책등을 읽었다. 국민학생이 대학생 문화를 아주 잘 알게 된 것이다. 점점 아빠는 대학생 문화에 빠져 들게 됐고 술도 마시게 되었다. 술을 막 배우기 시작한 아빠는 책가방을 맡기고 외상으로 술을 먹고 오는 날이 많아졌다. 엄마는 없는 형편에 가방을 찾으러 외상값을 갚고 가방을 찾아다 주기를 반복하자 슬슬 우리 가정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법 없이도 사는 우리 아빠가 술을 마시면 도망가야 한다
아빤 법 없이도 살 것 같은 사람인데 술만 먹으면 딴 사람이 됐다. 술에 취하면 다른 테이블에 앉은 사람의 눈빛이 기분이 나빴다고 하면서 폭행을 해서 경찰서에 가는 일도 있었다. 술을 먹고 집에 오면 그냥 자는 것이 아니라 무슨 한이 그렇게 많은지 가족들을 다 못 자게 하고 세간살이를 부수곤 했다. 술이 깨면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도 못할 만큼 술버릇이 안 좋았다. 그때 나는 결심했다. 술 먹는 사람과는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렇게 아빠가 대입준비생에서 대학생이 되었는데 우리 집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고 점점 더 수령에 빠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엄마도 그 모습이 지겹게 느끼셨는지 점점 밤늦게 돌아오고 집에서 잠만 자고 나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여전히 나는 학교에서는 반장에 모범생 집에서는 눈치 보는 쫄보 같은 이중생활을 하면서 지냈다. 그 당시 누구에게도 가정 형편이나 집에서 일어난 일들을 말하지 않았다. 아니 누구도 이 상황을 알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래서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그럴수록 나는 더 철이 든 아이가 되어갔고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모범생 어린이가 되어갔다. 빨리 커서 이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기억들이다.
상담사 선생님은 내게 찬물을 한 잔 주셨다.
" 참 힘들었을 텐데 바르게 잘 컸네요.. "
나는 그 소리를 듣고 펑펑 울기 시작했다. 상담만 오면 오는 것 같아서 울지 않으려 했는데... 상담 치료사 선생님은 매우 자주 나를 울리셨다. 아니, 어른이 되어 한 가정을 이루어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보니 그때 그 어린 나를 위해 울어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 아빠가 경제 활동을 시작하고 나서는 싸움이 잦아들었을까요? "
" 아뇨. 또 다른 문제로 다툼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
우리 집 단칸방에 볕 든 날
내가 6학년이 될 때쯤 아빠는 엄마의 소원대로 공기업에 취업을 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더 좋은 집으로 몇 달 안에 이사 갔다. 더 이상 푸세식 화장실이 아닌 하얀 슬리퍼 모양의 변기가 있는 집으로 이사도 가고 내 방도 생겼다. 내 방에는 이쁜 침대가 놓이게 됐고 더 이상 연탄불을 갈지 않아도 됐다. 기름보일러였기 때문이다.
아빠가 회사에 다녔지만 엄마도 계속 워킹맘으로 사셨다. 집에는 늘 나 혼자였지만 난 그때 우리 집이 떼부자가 된 줄 알았다. 진짜 엄마 말대로 공부만이 살길이고 신분이 상승 됐다고 믿을 만큼 좋았다.
단칸방에서 방 두 개 빌라로 이사 간 이후 사이가 더 좋아질 줄 알았는데 엄마는 회사일로 늦는 일이 잦았고 그것 때문에 아빠와 매일 싸움을 하셨다. 도대체 이 싸움은 언제 끝나는지. 가난해서 돈이 없어서 싸운다고 생각했는데 상황이 조금 나아져도 싸움거리는 늘 대기하고 쌓여있었다. 그렇게 2번째 이혼이야기가 오가고 온 동네 사람들 보기 창피할 정도로 우리 집에선 큰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와 엄마 아빠의 싸움 소리만큼 내 마음에는 깊게 상처의 골로 남아있다. 그땐 엄마나 아빠에게 표현은 못했지만 ' 이제 그쯤 할 때도 됐지 않나? 왜 저러면서 같이 살지? 저렇게 행복하지 않은데...'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들과 실랑이를 나의 내면 아이
나는 요즘 아들에게 손수 실내화를 빨래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내가 너무 곱게 키우나 싶기도 했고 손하나 까딱 하지 않고 집안일에 기여도가 1도 없었기에 자기 물건에 대한 책임감을 주고 싶었다. 마침 아들 학교 교과서에는 내가 도울 수 있는 집안일에 대해 배우고 있었기에 적기라 생각했다.
실내화 빠는 것을 알려 주고 있는데 아들은 대뜸 ' 내가 왜 이런 걸 해야 해.? 엄마가 하는 일인데..." 하면서 엄청 투정을 부리며 입을 댓 발 나와서 자기 실내화를 빠는 시늉만 했다. 그때부터 나의 레퍼토리가 시작되었다. 옛날에 어마 어릴 적에는 실내화가 천이어서 빨고 말리기 어려웠는데 지금은 이렇게 가볍고 빨기 좋은 실내화가 나왔는데 네가 신을 신내화도 못 빠냐고 아들에게 핀잔을 주고 있었다. 그때 전화벨리 울렸다. 친정엄마였다. 엄마가 호림이 뭐 하냐고 물어서 실내화를 빤다고 하니 엄마가 대뜸 이렇게 말했다. " 아니, 왜 애한테 그럴걸 시키냐? 네가 하지 않고? 그래서 이제 나이도 됐고 저 정도는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 크면 다 한다면서 겨우 9살짜리가 뭘 할 줄 안다고 시키니?" 하고 반문을 하는 것이었다. 그때 엄마한테 속상할 까봐 말은 못 했지만 " 난 5살 때부터 집에 혼자 있고 초등학교 1학년때 집안일 못하는 게 없었는데 자기가 신은 실내화 한번 빤 게 뭐가 대수인가?"라는 말이 목구멍 입구까지 나올 뻔했다.
전화를 끊고 여전히 못마땅한지 투덜 되면서 실내화를 빠는 아들에게 말했다. " 앞으로 네 실내화는 네가 빨아 신어!" 심리 상담 수업을 4~5개월을 받고 나서야 난 나의 내면 아이가 크지 못하고 6~7살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매 순간 내 아들 또래였던 미성숙한 내 내면 아이가 불쑥불쑥 튀어나와 나의 아들을 싸우고 질투하고 있다는 것을. 나의 내면아이는 보호받아야 할 시절에 보호받지 못해 아직도 미성숙한 아이로 30여 년 전 그 시절에 머물러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가난 속에 그 어둠과 우울 속에 아직 내면 아이가 크지 못하고 내 안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너무 불쌍한 내 어린 시절 그 아이를 다시 만나고 싶어지기도 했다. 삼담실에서 마치 5살짜리 아이가 엄마가 없어져서 우는 것 마냥 크게 울었다. 늘 씩씩해야 했고 늘 예의 바르고 모범적이어야 했던 나였는데... 그날 수업은 치료사 선생님도 나도 많이 울었다. 두 명 다 벌겋게 퉁퉁 부은 눈을 서로 마주 보며 그날 심리 상담 치료는 끝이 났다.
누군가 나를 위해 울어준다는 것은 생각보다 따스하고 위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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