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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차언니 Aug 24. 2020

남주, 여주의 아빠가 되다

남편에서 아빠로 거듭난 첫 순간의 기록

- 반백수 1호_육아휴직 아빠
- 반백수 2호_전업주부 엄마
- 반백수 3호_만 1세 아기


강종렬 남자네 남자. 아비가 아니고.


작년에 종영한 화제의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 나온 대사다. 구구절절 인물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주옥같았던 작품이지만, 반백수 부부는 특히 이 대사가 기억에 남아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상황들에 접목하며 장난을 치곤 했다. 8년간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아들을 갑자기 마주하게 되어 혼란에 빠진 강종렬(김지석 배우)의 명치뼈를 훅 때리던 이 말. 파파라치가 그의 사생활을 담보 삼아 협박하던 도중, 여전히 자존심을 굽힐 줄 모르는 모습을 빈정대며 내뱉은 말이다.


KBS 2TV <동백꽃 필 무렵>의 한 장면


누군가 2호에게 결혼생활의 만족도에 대한 질문을 한다면,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훌륭하다.'라고 말할 자신이 있었다. 결혼한 사람의 입장에서 결혼이라는 제도를 평가해보라고 한다면 역시 단숨에 '강추한다.'라고 말하며 엄지를 척 들 것이다. 물론 개개인의 사정과 상황에 따라 많은 것들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적어도 2호에게만큼은 결혼이 '잘한 일'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뿌듯한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판단을 하게 된 이유의 기저에는 1호의 끊임없는 배려가 잔잔히 깔려 있었다. 이런 식의 꽁냥꽁냥 한 이야기를 일일이 열거하기는 다소 쑥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굳이 한 가지를 언급해야 한다면 그가 육아휴직을 결정한 이유마저 3호가 아닌 2호 때문이었다는 것. 물론 2호의 건강과 3호의 풍요로운 생활에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는 선택의 갈림길에 설 때면 여지없이 2호의 행복을 첫 번째 이유로 꼽아주었다. 그것이 실상은 가정의 평화를 위한 입에 발린 소리에 불과했는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분명 그는 아주 사랑스러운 남편이었다.


그래서 2호는 당연히 1호가 아주 멋진 아빠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2호의 주변에서만큼은 '가정적인 남자'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사람이었기에, 굳이 논리적인 어떤 접근이 없더라도 느낌적인 느낌으로 당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어쩌면 2호는 아빠로서의 1호를 자랑해야겠다는 마음가짐을 미리부터 준비했는지도 모르겠다. 비슷한 시기에 출산한 친구의 이야기를 듣다가, 의외로 노련한 아빠인 그의 남편에게 한 번씩 충격을 받았던 것을 떠올려 보면 말이다. 아빠가 된 1호는 여전히 3호보다는 2호를 더 챙겼다. 덕분에 그의 육아 실력에 진일보라는 단어가 찾아오는 일도 아주 드물었다. 그는 퇴근 후 아이를 케어하기보다는 밀린 집안일을 도맡는 방식으로 2호의 곁에 있어주는 남자였다. 2호는 이토록 사랑받는 아내인 것이 흐뭇하면서도, 3호에게 최선의 노력을 쏟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1호에게 서운함을 느낄 때도 많았다. 3호를 사랑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는 아빠라기보다는 남편이자 남자였던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이 남자의 육아휴직은 예정대로 시작되었다.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할 줄 아는 1호에게 가정은 공적이면서도 사적인 미지의 세계였다. 그럼에도 그는 이 세계의 일원으로서 최선을 다했다. 아침에는 어김없이 출근해 육아에 전념하고, 야근을 겨우 끝낸 밤이면 터덜터덜 퇴근해 얼마 주어지지 않은 여가를 누렸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 일상의 반복이 반백수 패밀리의 가정에 퀀텀점프를 불러왔다. 3호는 기하급수적으로 웃음이 늘었고, 2호는 반대급부로 슬픔이 줄었으며, 1호는... 어느덧 남자 주인공이 되기를 포기하고 여자 주인공의 아버지가 되었다!


변화는 정말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 외출 도중 3호의 바지가 축축하게 젖은 것을 확인하고 황급히 집에 돌아오게 된 날이었다. 1호와 2호는 합심해서 기저귀를 갈기 위해 바지를 전격 개봉(?)했다가 충격적인 광경과 마주했다. 작은 볼일일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큰 볼일을 마친 3호의 기저귀 찍찍이가 잘못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무시무시한 녀석이 바지에 떡하니 내려앉아 '안녕?'하고 부부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1호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것을 손에 받아 들고 묵묵히 뒤처리를 하기 시작했다. 2호의 입에서 터져 나온 탄사와 무던한 1호의 표정 뒤로, 3호의 까르르 웃는 소리가 BGM처럼 깔렸다. 그리고 그 사건 이후로 1호는 어쩐지 2호보다 더 부모다운 부모가 되어 있었다.


부성은 강요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올바른 아버지상이 명확하게 존재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저 모든 부모는 부모로서 자신의 정체성과 완결성을 의심하고 또 의심하며 조금씩 발전해 나가는 것이 아닐까. 그래도 2호는 늘 되새긴다. 1호의 육아휴직이 진행되었던 기간에 벌어졌던 가장 큰 사건이 무어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단연코 이 스토리를 꺼내놓을 것이라고. 자신의 남편이 아이의 진정한 아빠로 거듭났던 첫 순간의 이야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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