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백수 1호_육아휴직 아빠
- 반백수 2호_전업주부 엄마
- 반백수 3호_만 1세 아기
첫 돌을 기점으로 3호에게는 소위 말하는 '땡깡'이 생겼다. 이전에도 자신의 욕구가 충족될 때까지 징징거림을 멈추지 않은 적이 간혹 있었지만, 몇 가지 단어를 마스터하면서 떼를 쓰는 스킬도 덩달아 진화한 것처럼 느껴졌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기면 다짜고짜 울기 시작한다든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언어와 비언어적 행위를 두루 활용하여 자신의 주관을 뚜렷하게 표현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게 이 무렵 아기의 보편적 기질일까? 초보 부모는 정답을 알 수가 없었다. 원활한 소통이 어렵다 보니 답답한 시간이 지속되었을 뿐이다.
저 거, 저 거!
단순한 지시어와 함께 3호의 손가락이 처음으로 향했던 곳은 간식거리가 있는 장소였다. 다음은 난장판이 될까 봐 2호가 꼭꼭 감추어 둔 놀잇감이 놓인 위치였고, 때때로 외출을 목적 삼아 문 밖을 가리키기도 했다. 비슷한 루틴이 여러 차례 반복되다 보니 어느덧 패턴이 읽혔다. 그렇게 1호와 2호는 나름대로 이 상황에 숙달된 부모가 되었다. 3호가 원하는 바를 재빠르게 파악해, 그녀가 흥분상태로 접어들기 전에 목표를 성취할 수 있도록 도왔다. 갑갑했던 부분이 살짝 해결되니, 터져버릴 것만 같던 속이 한결 후련해졌다. 1호와 2호에게 자신감이 생겼다. 이것이 폭풍전야인 줄도 모른 채.
여보, 3호 옷 좀 입혀줘요.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어느 오후. 버둥대는 3호를 씻겨 화장실 밖으로 내놓으며 2호가 1호에게 부탁했다. 평소 같으면 갈아입힐 옷을 챙겨 화장실 앞쪽에 놓아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은 졸음에 취해 칭얼대는 3호를 급히 추스르느라 미리 준비해 놓을 겨를이 없었다. 1호는 3호를 품에 안은 채 그녀의 옷이 정리되어 있는 서랍장 앞으로 갔다. 가장 위에 놓인 한 벌 짜리 옷을 꺼내 입히려는 순간, 반백수 패밀리의 하루는 새로운 국면을 마주했다.
아니야~
3호가 한 말의 뜻을 단번에 알아듣지 못한 1호는 다시 한번 되물어 보았으나, 3호는 여전히 같은 대답을 반복할 뿐이었다. 아니라니, 대체 무엇이? 고개를 갸웃하던 1호가 3호의 오른쪽 다리에 바지 한 짝을 끼워 넣었다. 앞서 자신의 의사를 충분히 피력했다고 생각했던 3호는 배신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형태로 스스로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1호와 2호는 그 곁에서 영문도 모르고, 3호가 분노 속에 변신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1단계. 평평한 바닥에 등을 밀착시키고 다리로 땅을 뻥뻥 걷어찬다.
2단계. 웃옷을 쥐고 흔들며 효율적으로 배를 깐다.
3단계. '아니야~'를 무한 반복하며 목청껏 울어 재낀다.
4단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며, 눈물, 콧물, 침이 온 얼굴에 뒤범벅되면 변신 완료!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1호는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3호의 몸을 꼭 안고 토닥였다. 조금 잦아든 울음소리를 틈타 빠르게 옷부터 입혀보려고 시도했지만 어림없었다. 평소 좋아하던 간식과 장난감도 소용없었다. 어디가 아픈가 싶어 열을 재 보았지만 체온은 정상이었다. 너무 졸린 나머지 심한 잠투정을 한 것인가 싶어 쪽쪽이를 물려보기도 했으나 잠에 들 기색은 아니었다. 3호는 아직 벌거벗고 있었다.
간절히 원했던 해답은 의외의 방법으로 얻어졌다. 1호가 입히려고 꺼내 놓은 옷이 다소 두텁다고 생각한 2호의 행동 때문이었다. 곁에 서서 서랍을 뒤적이다가 새로운 옷을 몇 벌 꺼내 들었는데, 그걸 본 3호의 발버둥이 멈춘 것이다. 갑자기 순한 양이 되어, 크고 둥글게 뜬 눈을 숱하게 껌뻑이며 1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2호는 어렵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급하게 질문했다.
우와, 여기에는 꽃 모양이 그려져 있네! 이 걸로 입어볼까?
이럴 수가. 3호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하지만 그녀가 승낙한 것은 하의뿐이었다. 2호가 꺼내 든 상의는 깐깐한 심사위원의 냉철한 판단 앞에 광탈하고 말았다. 바지를 입은 3호는 직접 서랍 앞으로 진출했다. 후보는 수십 벌의 웃옷. 선택받지 못한 한 무더기의 옷가지들이 이리저리 날아가 바닥에 내리 꽂혔다. 그리고는 마침내, 어른들의 눈으로는 이해가 잘 되지 않는 3호 만의 독특한 패션 조합이 완성되었다. 눈 앞에 펼쳐진 것은 분명 패션 테러의 현장이었다.
누군가 진정한 트렌드 세터의 필수 덕목은 도전 정신과 자신감이라고 했던가. 그 날 이후 3호는 소재와 컬러, 사이즈를 모두 넘나드는 아방가르드한 실험정신을 꾸준히 발휘했다. 때로는 옷을 껴입고 또 껴입는 무한 레이어드 룩이 탄생하기도 했다. 30세가 훌쩍 넘은 현재에도 2호가 골라주는 옷을 입는 것이 가장 편하다고 말하는 1호에게는 이런 풍경이 아주 낯설었다. 살이 찐 뒤로 몇 년째 단색의 옷을 주로 입고 있는 2호에게도 역시 그랬다. 만 1세 아기가 지닌 패션에 대한 의지는 반백수 패밀리의 구성원들에게 신선한 파문을 일으켰다.
1호와 2호는 나름 기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두 사람은 남들과 다른 의견은 감추는 편이 좋다고 배워온 세대였다. 그것이 바로 겸손이자 겸양이며, 타인에 대한 존중이고, 그런 식으로 평범하게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이라고 여겨왔다. 이런 가치관이 꼭 옳지만은 않다는 것을 사회생활 속에 여실히 느꼈지만, 평생 몸에 밴 습관이 쉬이 바뀌기는 어려웠다. 남들과 조금 다른 선택을 할 때마다 그들은 고정관념과 어렵게 부딪치며 낯선 미래로 나아가야 했다. 그러나 3호의 삶은 태생부터 명백히 달랐다. 물론 그녀가 주체적으로 선택한 옷이 보편적인 관점 속에서 패션 테러로 낙인찍힐 수도 있다. 또 그녀처럼 강력하게 자신의 의견을 어필하는 것이 때로는 방종으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원하는 것을 손쉽게 주장하고, 그것을 달성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타인의 시점에서 우스꽝스러운 일일지라도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패션 테러로 여겨지는 스타일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자신만의 아이덴티티가 될 수도 있다. 3호의 행동이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1호와 2호는 그녀의 모든 선택과 행보를 지지해줄 깨어있는 부모가 되기 위해 오늘도 노력 중이다. 살아가는 동안 부디 3호 자신만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