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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차언니 Oct 24. 2020

신보다 한 수 더 둔 리모델링

우리가 돈이 없지, 시간이 없냐?

- 반백수 1호_육아휴직 아빠
- 반백수 2호_전업주부 엄마
- 반백수 3호_만 1세 아기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영화 <베테랑> 포스터

영화 <베테랑>에 등장해 유명해진 대사인데, 평소 강수연 배우가 주변의 영화인들을 독려하며 자주 하던 말이라고 한다. 그렇다. 돈이 없다고 해서 다른 것도 없다고 여긴다면 그건 오산이다. 누구든 경쟁우위에 있는 주특기가 하나 이상 없을 리 없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반백수 패밀리의 경우에는, '시간'이 그러했다. 1호의 육아휴직으로 돈이 없지만 시간은 많은 세계가 열렸다. 그간 돈이 많으면 어디에 쓸지 상상해 본 일은 있어도, 시간이 많으면 무얼 할지 구체적인 고민을 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심지어 코로나라는 시대의 특수성까지 따라붙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니 더더욱 무얼 해야 할지 아리송했다. 그때, 입버릇처럼 내뱉고는 결국 지키지 못했던 약속들이 떠올랐다. 약속이라기보다는 개인적 다짐이나 숙원에 가까웠으려나. 아무튼 시간이 생겼는데도 이 일들을 완수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아가리 파이터'의 숨 쉬는 표본이 될는지도 몰랐다. 게다가 딱히 돈이 드는 일도 아니었다.


첫 번째 숙원 사업은 '보험 리모델링'이었다. 1호는 가족력 때문에 친구에게 급하게 들었던 보험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보험을 들던 시점에는 충분히 공부하거나 알아볼 여유가 없었다. 바쁜 회사 일과 아버지의 깊은 병환으로 심신이 여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2호의 보험에도 문제가 있었다. 무의미한 갱신형 담보가 많았다. 두 보험 모두 가성비가 떨어졌다. 한 달 가까운 시간을 들여 담보 하나하나와 보장 내용에 대해 공부했다. 새로운 설계안을 수차례 요청했다. 여러 번의 수정안이 오간 뒤에야 오케이 사인이 났다. 1호의 무시무시한 집중력 때문에 몇 차례 2호와 부딪힐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장애물 없는 드라마가 어디 있리오. 몇몇 담보의 해지환급금이 2호의 통장에 쏙쏙 꽂히면서 위기는 사르르 녹아내렸다. 마냥 공돈은 아니었지만 긴축재정 중인 당시의 상황에는 그 돈이 가뭄 속 단비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적은 비용으로 보장의 효용을 높인 리모델링의 성공과 함께 1호는 상품 설계 담당자와 거의 호형호제할 뻔한(?) 사이가 되었다.


메인이벤트라고 할 수 있는 숙원 사업은 '인테리어 리모델링'이었다. 말이 거창하지, 미관을 위한 변화라기보다는 집의 구조를 좀 더 효율적으로 변경하는 것이 목표였다. 갓난아기 시절엔 누워있기만 하던 3호가 앉아있고 기는 시간을 거쳐 이제는 걷게 되었으니 더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 두 평 남짓, 답답하게 쳐 있던 펜스를 걷어내야 했다. 높은 철제 펜스를 구매해 주방, 화장실 등 사고가 날 가능성이 높은 공간만을 막기로 했다. 기존에 사용하던 낮고 두툼한 플라스틱 펜스로는 날카로운 모서리가 있는 벽면과 가구를 둘렀다. 최소한의 범퍼 역할이었다. 매번 애를 쓰며 넘어 다니던 원래의 펜스를 치우자, 어른들의 골절 위험도 한결 줄어들었다.


다음 차례로 꽃차를 다루는 것이 직업인 2호의 작업 및 전시 공간으로 활용되었던 방 하나를 모조리 비웠다. 3호의 방으로 변신시키기 위해서였다. 층간소음을 최소화하기 위해 거실부터 방 내부까지 쭉 매트를 깔았다. 꽃차가 전시되어 있었던 책장에는 3호의 책을 꽂고, 교구를 정리해 올렸다. 제다 기구들이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가구를 들여 옷과 장난감도 정리해 넣었다. 거실에 있던 자잘한 장난감들이 모두 3호의 방으로 들어가니 집이 한결 넓어진 느낌이 들었다. 2호의 작업은 3호가 잠든 뒤 거실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공간이 넓어지니 3호의 숙원 사업도 이루어졌다. 잘 나가지 못하니 집에서나마 원 없이 실컷 뛰어노는 것!(이라고 직접 말해준 적은 없지만 확신한다.)


자신의 방이 생기던 첫 날, 행복한 3호의 탐색 타임


일전에, 밤낮 가리지 않고 신나게 놀고만 싶은 3호의 원대한 꿈을 김광석 님의 <사랑했지만> 멜로디에 살포시 담아 반백수 패밀리가 다 함께 불러 본 적이 있다. 잠시 흥얼거리며 미소 한 번 지으실 수 있기를^^


놀고 싶지만 (by.3호)

어제는 하루 종일 땡깡을 폈어
다크서클 내려앉은 엄빠 앞에서
귓가에 간절하게 울려 퍼지는
엄빠 음성 내 땡깡에 사라져 버려

때론 눈물도 흐르겠지
전략적으로
때론 바닥에 드러눕지
필사적으로
놀고 싶지만
밤새서 놀고 싶지만
그저 이렇게 누워서 떼써볼 뿐
나가 놀 수 없어
아기 상어 곁에 머물고 싶지만
떠날 수밖에(꿈나라로)
밤새서 놀고 싶지만

나가서 놀고 싶지만


반백수 패밀리에게 1호의 육아휴직은 신보다 한 수 더 두어 완성한 '마인드 리모델링'이었다. 여유로운 마음은 물론이고, 줄곧 생각만 하던 계획일지라도 충분히 실행하고 완수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그런데 겉으로 드러나는 목표를 완성한 것도 뿌듯한 일이었지만, 반백수 부부를 진정 미소 짓게 한 것은 행복에 가득 차 집안 이곳저곳으로 달음질하는 3호의 모습이 아니었나 싶다. 


일상에서 누리는 의외의 성취감은 업무에서 얻을 수 있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기쁨을 선사하는 것 같다. 자존감의 기반을 차곡차곡 다지는 느낌이랄까. 어쩌면 이렇게 서서히 부모가 되어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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