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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차언니 Oct 14. 2020

열꽃도 꽃이라지요

아이의 돌발진과 아빠의 애틋한 부성애

- 반백수 1호_육아휴직 아빠
- 반백수 2호_전업주부 엄마
- 반백수 3호_만 1세 아기


한창 벚꽃이 만개했던 자리에 초록 잎이 듬성듬성 정수리를 들이밀기 시작한 어느 봄의 일이다.

코로나로 인해 3호가 봄꽃과 제대로 눈 맞춤 한번 못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아쉬웠던 반백수 부부는, 고민 끝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외출을 감행했다. (1호의 육아휴직으로 외출하는 사람이 1도 없는 우리 가정이었기에, 당시에는 코로나에 대한 공포가 남들보다 훨씬 깊었던 것 같다.) 다행히 집 앞 공원으로 향하는 골목은 평소에도 그늘이 많이 져 있는 편이라 가지마다 한가득 꽃을 품은 나무들을 만날 수 있었다. 3호는 신나 끼야끼야- 소리를 질렀고, 마스크 속 반백수 부부의 얼굴도 꽤나 상기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머리 위로 나풀나풀 흩날리며 하강하는 분홍 꽃비는 사랑스러움 그 자체였다. 날아드는 꽃잎을 손에 쥐어보려고 아등바등하는 3호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자니, 몇 달째 이어져 온 집콕의 답답함을 모두 보상받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 길지 않았던 봄날의 외출은 꽃잎을 쓰다듬으며 '아 예뽀!'를 연발하는 3호의 미소를 배경 삼아 아름답게 마무리되었다.


꽃비 맞으며 집 앞 나들이!




아포. 아포. 아포.


다음날 3호는 눈을 뜨자마자 배시시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손으로는 배를 쓰다듬고 있는 채였다. 3호의 입을 통해서는 처음으로 듣는 단어였지만, 그녀가 애교 섞인 표정으로 웃고 있으니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새로운 단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자못 대견해하면서 말이다. 그날도 어김없이 아이와 놀아주며 장난을 치고 있던 1호가 늦은 오후 즈음 미묘한 표정으로 2호를 불렀다.


체온계 좀 가져와 볼래요?


측정 버튼을 누를 때마다 체온계의 액정이 붉은빛을 발산하며 37.8℃~38.5℃를 넘나드는 수치로 경고 의사를 내비쳤다. 그간 마냥 건강했던 3호 덕분에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을 해 본 일이 없었던 반백수 부부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아과가 문을 닫은 토요일 오후. 병원에 방문하려면 근처 종합병원의 응급실에 가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시국이 시국인지라 어른들이 품고 있는 바이러스에 3호가 무방비로 노출될 수도 있다는 점이 조금 두려웠다. 이미 열이 나고 있으니 왠지 새로운 감염도 쉬울 것만 같았다. 기운이 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그럭저럭 잘 놀고 있는 3호의 옷을 시원한 것으로 갈아입히며, 열이 내릴 때까지 지금처럼만 잘 버텨주기를 기도했다. 큰 병이 아니라 잠시 잠깐 지나가는 열감기 정도이기를.

밤이 되자 3호는 본격적으로 축 늘어졌다. 우리보다 먼저 이런 일을 겪었을 지인들에게 이런저런 문의를 하며, 집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조치를 했다. 3호의 옷을 벗기고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주었다. 이마와 등에는 해열 패치를 붙이고, 시시때때로 체온을 쟀다. 효과가 있었는지 38 이상의 고열이 지속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급한 상황이 오면 언제라도 즉시 먹일 수 있도록 해열제도 머리맡에 가져다 두었다. 꽃놀이에 대한 후회, 아프다는 3호의 표현을 간과했다는 자책이 2호를 공황 속에 빠지게 했다. 그녀가 넋을 놓고 있는 동안, 기동성 있게 대부분의 일을 감당한 것은 1호였다. 새벽이 깊어갈 때까지 묵묵히 3호 곁을 지키는 1호의 모습. 2호는 그를 바라보며 부성애의 든든함을 느꼈다. 어쩌면 모성애가 그 존재 자체로 위대한 것이 아니라 '아이와 함께 보내는 엄마의 시간'이 모성애라는 단어를 공고히 해온 것은 아닐까. 지난해 말부터 차곡차곡 쌓여 온 '아이와 충분히 교감했던 아빠의 시간'이 잠 많기로 소문난 한 사내의 눈꺼풀을 밤새도록 들어 올리고 또 들어 올렸다. 이것이 반백수 아빠가 지닌 부성애였다.


열꽃이 온 몸에 피었어도 밥은 아주아주 잘먹었다는ㅎㅎㅎ 볼록 튀어나온 1호의 배!


낮에는 신나게 놀고 밤에는 축 늘어지는 일상이 사흘간 반복되었다. 하지만 발열 이외에 다른 증상은 전혀 없었고, 그마저도 하루가 다르게 사그라지는 상황인지라 굳이 병원에 방문하지는 않았다. 정상 체온을 되찾던 날 아침에 3호의 기저귀를 갈다 보니, 배꼽 어귀에 불그스름한 반점 같은 것이 몇 개 콕콕 박혀있었다. 서둘러 웃옷을 들어 올리고 몸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꽤 많은 열꽃이 돋아나 있었다. 어느덧 13개월, 3호는 말로만 듣던 돌발진을 겪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로부터 닷새 후 열꽃도 말끔히 사라졌다.

3호의 발열 앞에 한없이 무력한 부모의 모습을 마주했던 일주일. 2호는 아이가 자주 아파서 출산 후 백일 무렵부터 병원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어야 했던 친구 부부를 존경하게 되었고, 그동안 크게 아픈 적 없이 내내 건강하게 자라주었던 3호에게 새삼스레 고마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반백수 패밀리에게 닥친 이 낯선 상황의 매 순간에 1호가 육아직으로 함께했다는 것이 큰 위안이 되었다. 3호가 낮에 크게 칭얼대지 않고 재미있게 놀아준 것도, 밤에 체온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지 않았던 것도 1호의 노력 덕분이었었으리라. 아, 위대한 부성애여!


한참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니, 그때 3호의 몸에 피었던 열꽃마저 봄날 우리를 스쳐 지나간 꽃들 중 하나처럼 추억된다. 반백수 패밀리 셋이서 기쁜 일도 슬픈 일도 놓치지 않고 모두 함께했던 나날. 그때도 지금도 미래에도, 봄꽃처럼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모든 순간들이 차곡차곡 모여 반백수 패밀리만의 달콤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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