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작가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무려 51년 9개월 4일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린 남자 주인공의 이야기를 그린다. 콜레라로 상징되는 공포의 시절에도 사랑만큼은 늘 그렇듯 지켜진다는 낭만적인 스토리. 사실 이 책의 내용은 딱히 중요치 않다. 올해 들어 2호가 입에 자꾸만 이 책의 제목을 오물거렸던 이유는 다름 아닌 제목 때문이었으니. 콜레라와 코로나의 어감이 어찌나 비슷하게 느껴지는지 <코로나 시대의 사랑>을 누군가에게 농담처럼 건네고 싶었으나, 이 책을 아는 이여야만 '훗' 하고 미소 한번 지어줄 만한 턱없는 개그(?)인지라 그저 이렇게 반백수 패밀리만의 공간에나 한번 내뱉어 본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 스페인어 판 표지
인스턴트 사랑이 가득한 현시대에도 <콜레라 시대의 사랑> 같은 오랜 기다림이 가능할까? 아마도 그 대답은 남녀상열지사보다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난했던 시절, 1호의 아버지는 매일 늦은 시간까지 일에 매진하셨다. 응당 식구들 입에 맛난 음식 하나라도 더 넣어주기 위함이었을 테지만, 여리디 여린 아이의 마음에는 간간이 외로움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애석하게도 어머니나 누나가 채워줄 수 없는 공허함이었다. 만년설처럼 쌓여가는 회포를 녹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아버지뿐이었다. 아버지도 1호의 그런 마음을 아셨던 것일까. 주말이 되면 공을 들고 아들의 손을 이끄셨다. 암묵적인 주 1회의 약속이었다. 어린 1호는 그렇게 축구를 좋아하게 되었다. 특히 아버지와 함께 축구하는 시간이 최고로 신났다. 늦둥이 아들을 둔 아버지는 행복해하는 자식을 흐뭇해하며 달리고 또 달렸다.
자신에게도 자식이 생기고 난 뒤에야 1호는 그 시절 아버지의 체력을 짐작하게 되었다. 이제 삼십 중반에 들어섰을 뿐인데도 쉽사리 지쳐버리는 1호이거늘. 지천명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힘든 티 한 번을 내지 않으셨던 아버지가 얼마나 대단한 분이셨는지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1호는 고등학교 시절에 종종 거실에서 잠을 청했다. 얼결에 잠드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의도적이었다. 자신보다 큰 몸의 아들을 번쩍 들어 방까지 안아다 주시는 아버지의 따스한 품 때문이었다. 사춘기의 아들이 아버지를 안아 드리는 일은 조금 쑥스럽기에, 그는 무의식을 핑계 삼아 아버지께 안기는 방법을 선택했다. 아들에게 늘 굳건한 버팀목이 되어주고자 하셨던 그분의 결연한 의지. 지금껏 그러했듯 하늘나라에서나마 앞으로도 오래도록 1호의 곁을 지킬 깊은 사랑일 것이다.
학창 시절 2호에게는 자타가 공인하는 애인이 한 명 있었다. 몇몇 친구들은 그를 '하트 아빠'라고 칭했다. 그 남자로부터 날아오는 문자 메시지는 온통 하트 투성이였으며, 그 남자가 바로 2호의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하트 아빠는 야간 자율학습이마무리되는 12시 무렵에 늘 학교 근처에 와서 대기했다. 야근을 하는 날도, 본인의 몸 상태가 성치 않은 날도 예외는 없었다. 회식으로 인해 술을 마시는 날에도 거의 운전석 옆자리를 지켰다. 그런 날에는 미안한 마음 때문인지 문자 속 하트의 개수가 더욱 많아졌다. 그것이 그 남자가 딸을 아끼고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세명의 딸을 자녀로 둔 하트 아빠의 가정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는데, 그중 두 가지를 소개해 본다. 하나, 무슨 일이 있어도 하루에 네 번 이상 볼 뽀뽀를 할 것.(일어났을 때와 잠들기 전, 집을 나서기 전과 돌아온 뒤에 뽀뽀를 하고 나면 주로 4회가 모두 찬다.) 둘, 주말 중 하루 이상은 온 가족이 함께 할 것. 두 번째 규칙은 세 딸이 모두 20대에 접어들며 자연스럽게 완화될 수밖에 없었지만, 첫 번째 규칙은 함께 있는 날이면 여전히 유효하다. 심지어는 1호까지 가끔 이 이벤트에 자연스럽게 참여하는 경우가 생겼다. 처음에는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괴이한 규칙으로 여겨진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가족이 되어 오랜 시간 지켜본 바, 일상적인 스킨십과 거리낌 없는 애정표현이 그만의 진실한 사랑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호에게도 늘 '아들!'이라는 호칭으로 살갑게 대하는 그의 유려한 마음. 그것이 지금의 2호를 있게 한, 그리고 앞으로도 반백수 패밀리의 곁에 머물 따스한 사랑일 것이다.
두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흡수한 1호는 '코로나 시대의 사랑'이라는 새로운 창작물의 주인공으로 이 자리에 서있다. 우연찮게 육아휴직이 코로나 유행 시기와 겹치게 되자, 초반에는 낙담하는 마음이 컸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나자, 이것이 축복일 수도 있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반백수 패밀리는 코로나 유행 초기였던 설 연휴 이후부터 육아휴직 종료 시점까지 거의 대부분의 외출을 금하고 있었는데, 그로 인해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해졌던 것이다. 누구 하나라도 마음이 상하면 삶의 터전 자체가 지옥 불 구덩이로 변하는 것은 순식간. 특히 3호가 분노의 화신이 되는 날에는, 동네 구성원 모두의 삶의 질이 저해되는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도 있었다. 갓 돌을 넘긴 3호에게 감정을 능숙히 컨트롤할 재간이 있을 리 만무했다. 게다가 그녀는... 조리원 시절부터 선생님들이 손꼽아 인정할 정도로 강력한 울림통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1호는 구성원 한 명 한 명을 살피고, 이해하기 위해 매 순간 노력했다. 유년 시절, 방학 동안 <탐구생활> 속 과제를 하던 것처럼 말이다. 때로는 1호의 아버지처럼 체력을 뛰어넘는 결연한 의지를 불태웠고, 이따금씩은 2호의 아버지처럼 자애롭고 다정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코로나 시대의 사랑'은 <콜레라 시대의 사랑>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아버지의 아버지에게서부터 대물림되어 반백수 패밀리의 일상을 지켜주고 있었다.
'코로나 시대의 사랑'은 아침마다 다 같이 외치는 '파이팅!'으로 매일 새롭게 공증을 받는다. 1호, 2호, 3호의 손이 한 번에 겹쳐지는 순간, 서로의 마음에 확인의 도장을 꾸욱 눌러 찍는 것이다. 공증의 효력은 생각보다 상당하다. 1호는 새로 시작되는 하루 속에서도 언제나 '아버지'라는 이름의 무게를, 그에게 양가의 두 아버지가 물려주신 사랑의 가치를 끊임없이 되새기곤 한다. 그는 두 아버지를 닮은, 그렇지만 두 아버지와는 확연히 다른 3호 만의 '아버지'가 되기를 꿈꾼다.
'I ♡ papa'라고 쓰인 턱받이를 입고 다같이 파이팅!!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는 코로나의 시대. 누구 하나 힘들지 않은 사람이 없을 이 시절. 집에 꽁꽁 갇혀 집콕 육아 중인 모든 부모님께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다 큰 자식들의 안위를 걱정하느라 느는 것은 주름뿐인 모든 부모의 부모님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