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부터 50인 이상의 모든 사업장에 본격적으로 적용된 주 52시간 근무제. 하지만 1호를 비롯한 주변인들이 대부분 대규모 사업장에 종사하다 보니, '주 52시간'과 '워라밸(워크-라이프 밸런스)'이라는 단어는 임신과 출산, 육아가 진행된 2년 남짓한 시간 내내 반백수 부부에게도 뜨거운 감자였다. 누구네 회사는 6시가 되면 컴퓨터가 저절로 종료된다더라, 또 어느 곳은 초과근무 수당을 모조리 없애버렸다더라, 어딘가에서는 야근을 야근이라 부르지 못하고 주말 근무를 주말 근무라 지칭하지 못하는 홍길동 뺨치는 상황이 생겼다더라, 무사히 업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개인용 노트북을 친히 하사한 대표이사도 있다더라... 흉흉한 소문의 연속이었다.
프리랜서에 가깝던 2호 직업의 특성상 그녀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흥미진진하게 관망하는 쪽이었다. 들은 이야기를 여기저기로 옮기면서도, 이 근로 제도의 시행이 우리네 삶을 윤택하게 바꿀 것인지 피폐하게 훼손할 것인지에 대해서 실은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육아를 하기 시작하고, 본격적인 전업주부의 삶을 선택하면서 2호는 오히려 이 문제에 새롭게 관심이 생겼다. 육아를 포함한 가사노동.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아주 기초적인 행위이면서도 가히 엄청난 체력과 정신력을 요구하는 이 어엿한 노동에는 셔터를 내리는 시간이 따로 없다. 하물며 주식 시장도 과열되면 서킷 브레이커가 발동되는데, 전업주부의 고단한 몸에는 애석하게도 일시 정지 버튼 하나 사사로이 붙어있지 않은 것이다.어른들 말씀이 '일할래, 애 키울래?' 하면 당연히 '일한다.'라고 대답하게 된다더니 그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 이제야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었다. 전업주부에게도 워라밸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호의 육아휴직이 시행되기 전. 2호가 이러한 깨달음에 대해 논할 때마다 1호는 짐짓 염려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실은 사안의 경중을 명확히 헤아릴 수 없었다. 가사노동이 힘들다는 것도 이해했고, 육아의 어려움 역시 확실히 인정했다. 아이와 하루 종일 단 둘이 함께 해야 하는 폐쇄적인 환경을 함께 통탄하기도 했다. 그러나 '백견불여일행(百見不如一行)'이라 하지 않던가.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일을 수백 번 설명으로 듣는다 한들 100%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기실 고단하기로는 1호도 2호 못지않았다. 주어진 업무를 가까스로 마무리하고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오면, 다시 제2의 직업인 가사노동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2호의 감정선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그녀의 지친 마음을 살뜰히 다독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회사에서 종일 시달린 후에 다시 집안일을 살펴야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을 삼킨 적도 왕왕 있었다.
막상 생각의 반전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밀물처럼 불현듯 밀려들어온 삶의 변화가 쉴 새 없이 너울거리며 1호의 머릿속을 삽시간에 헤집었다. '가사 노동자'이자 '주 양육자'로 24시간 풀가동되는 삶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다. 그동안 보통 남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다고 자부했던 가사 참여도가 아내라는 절대적인 비교 대상 앞에 서니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주말마다 충분히 경험해 보았다고 자신했던 육아에도 문제가 생겼다. 육아 일상이 제한 없이 무한한 시간으로 늘어나니, 당황스러운 사건들이 끊임없이 발생했던 것이다. 초보 전업주부는 이게 어떤 상황인지조차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자신의 낮은 숙련도 때문에 발생한 일인지, 애초에 육아가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것이 노력으로 나아질 수 있는 사안인지, 과연 2호의 적성에는 잘 맞는 부분인지도 궁금해졌다. 아무쪼록 육아휴직 초기의 1호는 직장을 다닐 때만큼이나 '저녁 있는 삶'이 절실하다고 느꼈다. 지난날 2호의 입을 통해 전해 들었듯, 전업주부에게도 직장인처럼 일과 삶의 밸런스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섰다. 양질의 휴식은 정신적인 건강을 가져다주고, 삶을 풍요롭게 하므로.
하물며 3호가 가지고 노는 블록 조차도 '밸런스'가 맞지 않으면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
그런데 보편적인 사람들이 보기에 육아휴직은 '육아'보다는 '휴직'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는 모양이었다. 특히 육아휴직의 주체가 엄마가 아닌 아빠가 되자, 편견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러한 종류의 색안경은 대놓고 드러나는 위협적인 형체가 아니라 은연중 묻어나는 자연스러운 형태에 가까웠다.
잘 쉬고 있어?
육아휴직이 시작된 이래 숱하게 들어온 간단한 인사말이었다. 으레 건네는 한마디에 큰 의미가 실렸을 리 없었다. 과거의 1호 역시 누군가에게 무심코 던졌을는지도 모르는 말이었다. 그런데도 전파를 타고 넘어온 저 문장이 귓전이나 눈가를 맴돌 때면 어쩐지 그의 마음은 자꾸만 번잡스러워졌다. 잊지 않고 친절하게 연락을 해 온 상대방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누가 보아도 악의적인 발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1호는 다부진 결심을 했다. 반백수 패밀리가 함께 하는 기간 동안 기깔나게 워라밸을 맞춰 보리라고. 열정적으로 육아와 가사 노동에 임한 뒤에 더욱 열정적으로 각자의 여가 생활을 쟁취해 보겠노라고. 그리하여 누가 보아도 인정할만한 '휴직'의 시간을 완성하리라고.
각오가 무색하게 자유는 의외로 쉽게 찾아왔다. 수면 아래에서 쉴 새 없이 발을 휘저어야만 우아한 모습으로 물 위에 둥둥 떠있을 수 있다는 백조처럼, '저녁이 있는 삶'을 향한 나름의 투쟁을 각오했건만. 1호의 육아휴직은, 당연히 얻을 수 있는 결과를 위해 왜 힘을 빼냐는 투로 스무스하게 자유를 전해주었다. 육아휴직을 계획한 단계에서는 미처 기대할 생각조차 해보지 못한 부분이었다. 최초에는 포커스가 온통 2호의 회복, 1호와 3호의 정서적 교감에 맞춰져 있어서였다.
육아휴직 초반에 1호에게 닥쳤던 번뇌의 시간이 지나가자, 전혀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지리하게 늘어지며 진행되던 집안일과 육아를 두 사람이 번갈아 해치우다 보니 자연스레 시간이 단축되었고, 심리적 육체적 부담이 모두 줄어들게 된 것이다. 아이가 잠든 뒤에 듣고 싶었던 강의를 온라인으로 수강하고, 인터넷 서핑을 하고,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함께 찻잔이나 술잔을 기울일 여유도 생겼다. 전업주부 동반자인 반백수 부부에게 드디어 저녁이 있는 삶이 주어진 것이다!나무를 좀 더 건강하게 키워보자고 시작한 행위로 숲이 아름답게 가꾸어진 셈이다.
감사하게도 두 사람에게 주어진 한시적인 워라밸. 육아휴직이 종료되어 각자 본연의 임무에 복귀하게 되면, 다시 느끼기 어려운 해방감일지도 모른다. 반백수 부부는 이 귀중한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블로그에 짤막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 기록이 불어나고 불어나, 이제는 브런치에 조금 더 정제된 반백수 패밀리만의 이야기를 게재해보기도 한다.
아빠의 육아휴직을 고민하며 이 글을 클릭하게 된 그대여, 당신의 가치관이 '금전적 여유' 보다 '가족애'에 아주 조금이라도 더 가깝다면 더 이상 주저하지 말라. 잠시 잠깐의 용기 있는 선택으로 생각보다 더 많은 것들이 달라질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