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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May 05. 2024

'초여름의 기억'을 읽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일요일 오전. 남편은 일이 많다며 출근하고 혼자 커피 한잔 마시고 컴퓨터 앞에 앉았지요.      


 키보드 왼쪽에 정이흔 작가님의 ‘초여름의 기억’이 놓여있어요.     


 세게 까드리기로 약속한 지 오래라 독후감을 쓰기로 마음먹습니다.     


 앗. 그런데 우리 집 둘째 냥 쏘냐가 무릎 위에 올라와 앉는군요. 묵직한 무게감을 느끼며 글을 쓰려는데 갑자기 손목을 깨물렸어요. 헉.     


 저의 게으름을 탓하는 것인지, 딴 데 정신 팔고 있는 엄마가 못마땅한 것인지, 그녀의 마음을 알 순 없답니다.      


 얼른 글을 완성해야지 결심합니다. 소냐의 체온으로 무릎은 따뜻하네요. 골골골. 진동과 함께 변명부터 하겠습니다.     


 4월엔 많이 아팠어요. 왼쪽 눈, 오른쪽 어깨, 양쪽 치아. 그러다가 심한 몸살로 삼 일간 앓아누웠지요. 겨우 회복하고 하루 나들이 갔다가 왼쪽 발목마저 삐끗했네요. 돌아가면서 아픈 바람에 글을 쓰지 못하고 있었어요.      


 초여름의 기억은 주로 치과 대기실에서 읽곤 했습니다. 진료실에서 들리는 치아 다듬는 소리(치이익~~~, 아시죠?)를 들으면서 말입니다.     


 병원이란 병원은 다 무서워하지만 그중 압도적으로 무서운 곳이 치과입니다. 기다란 의자에 누워 동그란 구멍이 뚫린 천으로 얼굴이 가려지는 순간, 세상에서 가장 무기력한 존재가 된 기분을 느낍니다.      


 그렇게 무서워하는 치과 대기실에서 읽는 소설이라니. 상상이 가십니까? 모골이 송연한 상태를 온몸으로 느끼며 정신은 소설 속으로 빠져들었어요.     


 그만큼 술술 이야기가 잘 읽힌다는 의미겠지요?     


 초여름의 기억은 짧은 소설 모음으로 총 서른 개의 작품이 담겨있습니다. 작가님은 엽편소설이라는 표현을 쓰던데 A4용지 한 장 분량의 짧은 소설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책에 포함된 소설 중에는 두 장 분량이 넘는 것이 몇 개 있고 ‘삼만 원’과 ‘엇갈린 기억’은 연작소설로 보입니다.   

  

 혹시 성석제 님의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를 읽어보신 분이라면 소설의 형태에 대해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럼 상세한 내용으로 들어가 볼까요?     


1부 추억 속에서     


 어린 시절의 기억을 소환하는 내용들이 담겨있습니다. 다가구 주택에서 살았던 초등 때, 도서관에서의 고백, 고무줄 끊고 도망가는 같은 반 남자아이, 풋사랑을 시작했을 때의 변화 등. 읽다가 푸풋, 하며 웃었지요.

      

 작가님이 소설가이자 시인이기도 한 탓인지 마치 시를 읽듯 마음 한구석을 아리게 만드는 구절도 있는데요. ‘그해 가을’의 일부분입니다.      


 ‘그렇게 그녀를 보낸 것이 벌써 한참 전 가을의 일이었고, 새봄은 아직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니 아직도 그는 가을과 새봄 사이에 갇혀서 겨울을 보내고 있는 셈이었다. … 중략… 그렇게 그는 새봄을 건너뛰며 살아왔다.’를 읽을 때는 슬퍼서 더 아름답게 느꼈습니다.      


2부 상상 속에서     


 재미있거나 섬뜩하거나 아쉬운 상상을 하도록 만드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서늘하기도 하고 짜릿하기도 한 반전이 소설 곳곳에 숨어있지요.      


 저는 ‘가면의 늪’을 제일 재미있게 읽었는데요. 여자친구의 평가에 얽매여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던 지훈의 결심과 그 이후가…      


 깜짝이야, 했습니다. 직접 읽어보시는 것이 좋을 듯하여 결말을 알려드리지는 않겠습니다. 후훗.   

  

 다만 ‘지훈은 점점 소설의 소재에 대하여 지독한 자기 검열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위선적인 작가의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부분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소설가는 인간의 다양한 내면을 그려내는 일을 하는 사람인데 과도한 자기 검열은 글의 잠재력을 갉아먹기도 하지요. 그렇다고 거름망이 없다면 위험한 수위로 아슬아슬할 테고. 참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같은 소설가로서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한다면, 작가는 가장 가까이에서 주인공을 견뎌낸 사람이라는 점을 감안해주셨으면 합니다. 작가가 주인공을 마음대로 좌우하지 못합니다.      


 어쩌다 이상한 주인공을 만나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얼마나 힘이 드는데요. 글이 끝날 때까지 함께 살아야 합니다.      


3부 현실 속에서      


 2부까진 유쾌한 쪽이 우세였다면 3부는 마음이 무겁습니다. 이미 겪었거나 겪을만한 상황을 소재로 현실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지요.      


 저는 ‘우울한 하루’가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실직하고 퇴직금도 받지 못한 가장이 극단적 선택에 내몰린 상황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막 옥상 난간으로 향하는 주인공의 발길을 돌린 아내의 문자 메시지에 가슴이 찡했습니다.      


 “여보! 지금 어디야? 집에 있지? 나 오늘 일찍 집에 들어갈 거야. 이따 봐. 우리 오늘 둘만 나가서 진짜 오랜만에 밖에서 한잔하자. 알았지?”     


 소설은 전반적으로 인물의 심리를 자분자분 풀어내고 있습니다. 친근한 소재로 가볍고 따뜻하게 독자에게 다가가는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조금 아쉬운 점은 착한 주인공(남주, 여주 불문)이 자주 등장해 주인공 성격이 좀 더 다양하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아무래도 다정한 작가님의 성격을 닮은 주인공들이 작가님을 찾아와서 생긴 부작용인 것 같습니다.      


 독자의 입맛은 다양하니 골고루 맛볼 수 있도록 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친구 사이’에 나왔던 비혼의 맹세를 깬 못된 친구 같은 조연이 주인공이 되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리고. 음~~     


 작가님. 표지가 너무 구립니다. 차라리 작가님이 손수 그린 수채화를 표지로 하심은 어떨지. 지금 표지는 좀…….     


 개인적으로 하드커버에 한지 느낌의 표지를 좋아합니다. 개정판엔 표지를 좀 예쁘게 만들어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다음 소설 ‘섬’은 한 달 후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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