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빠지지 않고 내 글을 읽어주는 독자 두 명이 있다. 한 명은 남편, 다른 한 명은 동생이다.
글을 읽은 남편은 마누라가 무서워서 생긴 생존전략인지 대체로 긍정의 시그널만 날린다. 하지만 동생은 그렇지 않다.
“이번 글 어때?”라 물으면 종종 머뭇거린다. 그러다 결국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하는데, ‘시놉시스 같다. 너무 축약되었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쓴 글로 보인다’는 답이 주로 돌아왔다.
덧붙여 자신은 눈에 그려지듯 보이는, 현장에서 경험하는 듯한, 화자와 함께 숨을 쉬는 글이 재밌다고 했다. 그리하여 나는 숱하게, 반복해서, 눈에 그려지는 글이 재밌다는 말을 듣는 운명을 맞이했다.
그놈의 ‘눈에 그려지는 글’은 어떻게 쓰는 거야?
이리저리 고민해 봐도 가슴만 답답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아하, 하고 무릎을 치게 된 것은 시창작 수업에서였다.
“자신이 전하고 싶은 것을 절! 대! 로! 직접 말하는 식으로 설명해선 안 됩니다. 이미지를 통해서 보여주는 방식으로 쓰세요”라는 선생님의 말씀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그리하여 두 번째 작법 주제, ‘서사 보단 묘사’를 정리해 본다.
서사는 사건을 줄거리로 전달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달리 묘사는 눈으로 보듯, 손으로 만지듯, 귀로 듣는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다. 선생님은 눈앞에 보이듯 묘사하라고 역설했고 심지어 직접적 표현은 문학이 아니라는 극단적인 말씀까지 하셨다.
후덜덜! 이제까지 난 뭘 썼던가.
그러자 나처럼 충격받은 신사 1(이하 편의상 학생들을 ‘신사’와 ‘숙녀’로 부르기로 한다)이 질문했다.
“선생님. 그럼 묘사만 넣어도 시가 됩니까?”
“당연하지요.”
“그러니까 시가 되게 쉬워 보이는데요.”
선생님의 대답에 숙녀들이 웅성거렸다.
질문을 기회로 묘사만 넣은 시를 함께 읽어보았다. 김명희님의 한낮이라는 시다.
파란 지붕 위에서 잿빛 비둘기가 운다
처마 아래 핀 자주색 국화꽃이
푸른 바람에 잎새를 흔든다
황금빛 가을, 나무 위에 붉은 사과들
누렁소 한 마리 매어 있는 어두운 외양간 앞
보라색으로 피어 하늘을 넘보는 제비꽃
이 시는 한낮의 풍경을 한 폭의 그림처럼 선명하게 떠오르게 한다. 읽으면서 그저 마음이 환해졌다. 선생님도 무척 아름다운 시라고 칭찬하셨다.
그때
숙녀 1: 제비꽃은 봄에 피는데요
신사 2: 요즘은 기후 이변으로 계절과 상관없이 피는 것을 봤어요
숙녀 3: 그래도 봄에 피는 꽃을 가을 풍경에 넣어도 될까요?“
질문이 쏟아졌다.
선생님: 문학은 자유분방해서 과학적인 이유와는 무관합니다. 문학적인 이유만 뒷받침되면 그걸로 충분하지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문학의 자유분방함이 아니라 너무나 자유로운 수업 분위기 때문에…
역시 시를 쓰는 사람들은 남달랐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수업이 이어졌다. 선생님은 구체적인 비유의 중요성, 관념어 피하기, 사물화 하기를 강조하셨다. 같은 취지를 다양한 버전으로 설명한 셈이다.
‘나는 저 여자를 사랑한다’는 표현보단 ‘저 여자 앞에 가면 가슴이 떨린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가 훨씬 생동감 넘친다. 사랑의 크기도 일률적이지 않으니 개미만큼 사랑하는 것과 코끼리만큼 사랑하는 것은 다르게 표현해야 한다. 결국 강의의 핵심은 막연하게 쓰지 말고 구체적이고 선명하게 쓰라는 이야기였다.
수업을 듣고 있자니 시의 세계는 멀고도 험하게 느껴졌다. 휴~~ 한숨 쉬는 나를 보고 숙녀 1이 말했다.
”먼 길 가려면 함께 가야 한다는 말이 있어요. 오래오래 함께합시다.“
내가 고객을 끄덕이자 숙녀 2가 말했다.
”뼈를 깎는 고통까진 아니더라도 수업 이삼 년 들으면 등단할 수 있어요.“
과연?
의구심이 하늘을 찔렀지만, 시적으로 위로하는 말씀에 어찌어찌 수긍하고 말았다. 역시 시를 쓰는 사람들은 남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