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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Jan 12. 2024

기적을 맞이하다

 아침 운동을 나서는데 첫눈이 왔다. 손톱 끝자락, 봉숭아 물이 아슬하게 남아있다. 날은 차갑지만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집에 돌아와 ‘사랑해<허영만 그림, 김세영 글>’를 읽었다. 아끼는 후배에게 주려고 샀다가 선물을 포기한 책이다. 이 책은 임신으로 결혼한 신혼부부가 주인공인데, 후배가 난임으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책장 아래 방치된 채 먼지만 쌓여가던 ‘사랑해’를 집어 든 것은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이었다. 오늘따라 따뜻한 글을 읽고 싶었다. 그리고 아침의 예감이 적중했다. 나는 책을 읽다가 좋은 일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남주 철수와 여주 영희가 함박눈을 맞으며 데이트한다. 에피소드 108 부분이다.     


오늘따라 철수가 말이 없다.     


영희: 왜 아무 말도 안 해?

철수: 저 앙상한 나뭇가지를 볼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

영희: 나보다 예뻤어?

철수: 남자야 남자!     


(중략)     


철수: 나는 그 선배 덕분에 시라는 게 뭔지 알게 됐어.    

 

(중략)     


철수: 자기 손으로 직접 시를 짓는 사람이 내 앞에 서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싱클레어 루이스 -

<추가 설명하자면, 철수는 일상대화에서 여러 작가의 말을 인용하는 걸 즐기는 편이다>

영희: …

철수: 나를 죽어라 팬 놈은 잊을 수 있어! 나를 죽도록 사랑했던 여자도 잊을 수 있을지 몰라.

하지만, 나에게 처음으로 시를 지어준 사람은 잊을 수 없을 것 같아.

영희: …

철수: 그만 돌아가자. 감기 걸리겠다.

영희: 말 걸지 마. 나도 시 지어서 당신 줄 거야! 시상이 떠오르기 전엔 죽어도 안 돌아가!     




 이 깜찍한 커플을 보니 생각났다. 내게 처음으로 시를 지어준 사람.      


 서랍을 열어 뒤적뒤적. 어디에 두었더라?     


 아! 찾았다. 이사 다니면서 대부분 잃어버렸지만 몇 개는 남았다. 게 중 하나를 소개한다.    



 

世人一生尋幸福

幸福絶不在遠處

只要對愛傾酒杯

人生何時不幸福  

   

해설     

사람들은 평생 행복을 찾아 헤매지

그러나 행복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네

사랑하는 그녀와 술잔을 기울일 수만 있다면

한평생 행복하지 않은 순간이 있으랴     


2002. 10. 13. 술 고프고 배는 더 고픈 날에, 당신의 민     




 요 편지는 고시생일 때 남편이 써준 것이다. 신기하게도 남편은 종종 한시를 지어서 중국어낭독해 주는 걸 좋아했다. 난 편지 받는 게 마냥 기뻤었다.     


 흠~~ 그런데 이제 보니, 그때도 애주가였구먼. 당시엔 사랑에 눈이 멀어 주당인걸 눈치채지 못했다. 부부싸움의 주요인이 알코올과 관련된 일이었으니, 이런 편지를 받은 독자님이 계시다면 주의하시길 권고드린다.

     

 여하튼 나에게 처음으로 시를 지어준 사람의 가치를 재발견한 오늘, 혼자서 괜스레 히죽거렸다.      


 그리고 자기 손으로 직접 시를 짓는 사람이 눈앞에 여럿(시 창작 수업 가면 만날 수 있어요) 있는 요즘, 나는 매주 기적을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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