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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DITOR Aug 10. 2017

시의 매력 속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시의 문장들> <마녀의 독서처방>의 저자 김이경


심호흡

그와 만난 후 '시를 읽는 일'이 참 근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와는 그리 가깝지도, 또 엄청 멀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하고 있던 나로서는 '시'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는 계기가 되었달까. 물론 퐁당 빠지려면 아직 멀었지만.


인터뷰를 청하기 전, 맑은 파랑의 옷을 입은 <시의 문장들>을 한 장 한 장 읽어갔다. 먼저는 구성이 눈에 띄었다. 왼쪽은 세로 쓰기를 한 시의 문장이, 오른쪽은 그 문장과 엮인 개인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알고 있던 시에서도 생소한 문장이 있었고, 전혀 몰랐지만 너무 좋은 문장을 담은 시를 찾기도 했다. 어디 그뿐인가. 이야기가 너무 솔직하고 와 닿아 시를 몇 번 더 읽게 되는 부분도, 같은 문장을 보고도 전혀 다른 감정을 느껴 신기하게 다가오는 부분도 있었다.


시와 이야기가 느슨하게 엮여 더 매력적인 책, <시의 문장들>을 쓴 김이경 작가와 삼청동 근처 카페에서 마주 앉았다. 그와 주고받은 잔잔한 호흡이 지금도 아련히 떠오른다. 인터뷰를 하러 갔다가 팬이 되어 나온 그날의 기록.


굳은 마음을 말랑하게 하는 시인의 말들 ⓒHYE강
가장 좋았던, 안현미 「시간들」ⓒHYE강


들숨과 날숨의 기록

HYE강(이하 생략): 저자 소개나 책 중간중간 나온 부모님과 오빠에 대한 에피소드가 인상적이었어요. 책과 친하게 지낼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신 것 같아요.

김이경(이하 생략): 좀 그래요. 총 5형제인데, 제가 막내고 위로 형제들이 많아요. 어렸을 때 집이 넉넉지 않아서 책이 많지는 않았어요. 그렇지만 책을 읽는다는 것에 대해서 가치 부여를 많이 했던 집이었죠. 책 살 돈이 별로 없어서 사지는 못했지만, 아버지께서 신문은 꼭 읽으셨어요. 집에 신문이 대여섯 종 이상 항상 있다 보니, 그 곁에서 저도 신문 만화(만평)부터 읽었죠. 그 때부터 읽는 행위가 하나의 습관이 된 듯해요.


엄마는 오히려 책 읽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어요. 제가 소설책 같은 걸 읽고 있으면 "그만 읽어라~" 하시기도 하셨죠. 엎드려서 책을 읽다 보면 눈도 나빠지고, 해야 할 공부도 안 하니 쓸데없는 책을 읽는 느낌이 드셨나 봐요. 누구도 읽으라고 한 사람은 없었지만, 저는 읽는 게 재미있어서 읽었어요. 물론 나가서 노는 걸 더 좋아했지만.(웃음) 아무래도 오빠 언니들이 먼저 크니까, 그들이 문학을 좋아하고 시를 읽으니까 자연스럽게 저도 같이 읽게 된 것 같아요. 빨리 어른이 되어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나 봐요.


중학교 때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를 보고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들었는데요. 그 책의 어떤 점 때문인가요?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이 시작되기 전에 당시 선생님께서 마지막 청소를 마무리한 학생들을 데리고 학교 앞 서점으로 가서 책을 한 권씩 고르게 해주셨어요. 저와 다른 한 친구에게만은 직접 책을 골라주겠다고 하셨죠. 그 친구에게는 토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제게는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를 골라 주셨어요. <죄와 벌>은 제목을 들어본 기억이 나는데, <분노의 포도>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포도가 왜 분노를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작가도 처음 보니까(웃음) '선생님이 왜 쟤한테는 좋은 걸 주고 나한테는 이 책을 줬지?'라고 생각했어요. 옆에 있던 친구들도 막 놀렸고요. 당시 선생님은 그 책에 대해 아무 설명이 없으셨어요. 가만 보니까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설명은 있었지만 관심은 별로 안 갔어요.


하지만 그땐 책 선물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있었기도 하고, 선생님이 주신 거니까 읽기 시작했죠. 한 챕터는 상황 설명, 한 챕터는 스토리(사건 전개)가 이어지는 식이었어요. 중학생 시절에는 상황 설명은 재미가 없고 스토리는 재미있었는데, 선생님이 주셨으니까 재미없는 부분을 건너뛰지는 못하고 방학 내내 하루 몇 쪽씩 정해 놓고 그 챕터를 읽었어요.


결과적으로 말하면, 다 읽고 나서는 엄청난 감동을 받았죠. <분노의 포도>는 사회적 비판 의식이 굉장히 강한 책이었는데, 그 책을 읽으면서 문학의 역할에 대해 새삼 깨닫게 되었어요. '문학이 세상에 소외된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줄 수 있구나'라는 일종의 정의감을 느꼈어요. 선생님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고 세상을 위해서 목소리를 내는 작가가 되면 너무 좋겠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습니다.


재미있는 건, 책을 선물해 준 선생님을 당시 제가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몇 년 전에 중학교에 가서 생활기록부를 떼어 봤는데요. 사실 저는 제가 공부는 좀 못해도 인간성은 괜찮은 아이인 줄 알고 있었어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약간 좋은 쪽으로 기억을 하려고 하잖아요. 그런데 중학교 1학년 때 그분이 기록한 생활기록부에는 제가 상당히 자기중심적인 아이라고 쓰여 있더라고요. 나중에 곰곰 생각해보니, 제가 또래보다 책을 조금 더 읽고 그래서 상당히 잘난 척을 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어요. 그 생활기록부를 읽고 나서야 선생님이 그 책을 왜 주셨는지 생각했죠. 더불어 사는 일의 중요성과 그렇기에 희생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걸 가르쳐주고 싶으셨던 게 아닐까요.


정말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선생님이 그래서 그 책을 추천해주셨구나, 하고 느꼈어요. 그걸 넌지시, 책으로 알려주신 게 너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다음 해 생활기록부에는 평가가 확 달라져 있어요. 협동심도 강하고, 친구들과 잘 어울린다고. 그때 참 많이 바뀌었나 보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어려서는 선생님의 뜻을 다 헤아리지 못했는데 나중에 뒤돌아보니 참 깨닫는 점이 많네요.


작가, 편집자, 논술 교사, 독서회 강사, 대학 강사 등 여러 직업을 가지셨어요. 책 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 생각해 본 직업일 텐데요. 가장 애착이 가는 직업은 뭘까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제일 오래 하는 걸 보면, 가장 좋아하는 일이 아닌가 싶네요. 어려서부터 선생님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교사 자격증을 딸 학점을 못 따서 못했어요. 뒤늦게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논술 지도를 할 때를 생각해보면, 가끔 학생들로부터 피드백이 올 때 굉장히 반갑고, 일의 보람을 느껴요.


책을 쓰는 일은 그런 식의 피드백 자체가 (독자로부터 칭찬을 받아도) 꼭 좋기만 하지는 않거든요. 그 모든 게 글 쓰는 제게는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어서요. 독자 자체를 너무 의식하면 글쓰기는 자유로움을 잃어요. 칭찬이 됐든, 비판이 됐든 지나치게 그것에 구애받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 자유로움과 긴장을 유지해 나가는 게 힘들기는 하지만, 그 덕분에 저 자신은 계속 깨어 있으려고 하기도 하죠. 그런 점에서는 지루해질 틈이 없는 일이에요.


그럼 가장 힘들었던 직업은 무엇이었나요? 

제일 보람 있던 일이기도 했지만, 출판사에 다닐 때가 제일 힘들었던 것 같아요. 몸 자체가 망가지고 일이 워낙 많으니. 몸으로 편집일을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제가 있던 출판사의 초창기라, 편집자가 거의 1명 정도 있던 시절이었어요. 일본식 용어 습득도 어려웠고 건판 보고 대수 맞추는데서 실수가 생겨 힘들기도 했어요. 나이는 많은 편집장인데 정작 직원들보다 잘 모르는 부분도 있어서 더 빨리 미친 듯이 몰입해서 일을 했던 것 같아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정말 힘들었긴 하지만 책이라는 게 그렇게 매력적인 것인지 그때 처음 알게 된 것 같아요. 늘 책을 읽기만 하는 사람이었는데 직접 만들어보니 완전히 느낌이 달랐거든요. 그걸 계기로 책이라는 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하게 됐어요. 회사를 그만두고 3년에 걸쳐 <순례자의 책>을 쓸 때, 책이란 무엇인가, 책에 대한 고민을 계속하게 되었죠.


편집자 생활과 3년 동안 그 책을 쓸 때, 책에 대해 시니컬해지기도 했어요. 책이 지닌 좋은 점이 워낙 많지만, 책을 많이 읽어도 훌륭하지 못한 (저를 포함해서) 그런 사람이 워낙 많잖아요. 책을 만들면서 그런 분들을 많이 보기도 했고, 책을 이용해서 더 나쁜 일을 만드는 사람들도 봤거든요. 그렇다면 책을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떤 방식으로 책을 읽어야 하는지, 사람들에게 책을 읽으라고 해야 하는 건지, 그런 고민들을 많이 했어요. 또 20년 넘게 독서회를 하고 있으니까 회원들을 보면서도 그런 고민들을 계속했었죠.


개인적으로 <시의 문장들>은 '시가 좋아지게 만드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님께 시의 맛을 알려준 시가 있다면요?

김수영 시인의 시가 제게는 그랬어요. 큰 그늘 같은, 나무 같은 시. 시가 좋아질 때는 연애할 때인 것 같아요. 연애하고 실연당하고 그럴 때. 그럴 때는 기형도 시인의 시를 많이 읽었죠. 입속의 검은 입」은 거의 제 얘기라고 생각하면서 읽었어요. 제가 살던 동네(마포구 구수동)에 김수영 시인이 살았었는데요, 지금은 너무 많이 바뀌었지만, 그 당시에는 강이 흐르고 다리가 있는 가난한 동네였어요. 잘 알려지지도 않은 촌스러운 동네에 괜히 김수영이 살았다는 이야기만으로 '난 시인의 마을에 살아'라는 뿌듯함도 느꼈죠.(웃음) 


처음엔 언니 오빠들이 김수영 시를 다 좋아하니까 덩달아 관심을 가졌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의 시는 뭔가 좀 알 것 같은 느낌이 있었데 김수영 시인의 시는 모르겠는 거예요. 시집 전체를 읽어도 모르겠다는 그 느낌이 숙제로 남았었나 봐요. 그래서 김수영 시인의 시를 평생에 걸쳐 읽고 읽고 또 읽었어요. 도대체 무슨 뜻인지를 알고 싶어서.


「풀」이라는 시가 제일 유명한데, 저는 사실 그 시가 왜 좋은지 모르겠더라고요. 민중이 풀 같다고는 하는데... 바람보다 빨리 눕는다는데, 그러면 민중이 기회주의자라는 건가?라는 생각도 들고.(웃음) 너무 뻔한 거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고. 그런데 몇 년 전, 김수영 시인이 쓴 시 전집을 계속 읽다 보니 그 시가 나오기 전에 쓴 다른 시들을 보게 됐어요. 그 시들에 이미 「풀」로 넘어가는 연결적인 시사점이 담겨 있었어요. 이 분의 생각이 이런 식으로 바뀌어가고 완성되고 있었구나, 느끼니 시가 다르게 보였죠. 그 사고를 얼마나 오랫동안 굴리고 고민하면서 지냈을지, 단지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자기 삶의 철학을 세우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가 보이더라고요. 


그때 기분이 굉장히 좋아졌어요. 「꽃잎」 3 연작이 너무 어려웠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런 게 아닐까?’란 생각이 불현듯 들 때, 「풀」도 다시 보였어요. 하나씩 하나씩 수수께끼를 푸는 희열감 같은 게 시 안에 있는 것 같아요.


수능 공부나 학교에서 시를 배울 때는 텍스트가 평면이었는데, 삶의 맥락에서 보니 시가 입체적으로 다가 오더라고요. 시인의 삶의 무게를 알고 시를 보는 것도 좋은 듯해요. 시인에 대한 공부는 따로 하시나요?

관심이 생기면 시 비평집도 찾아서 읽게 되고, 시인에 대해서도 알게 되는 것 같아요. 몇 년 전에 윤동주 평전을 읽으면서 든 생각인데, 윤동주 시인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생각하는 윤동주는 얼굴이 하얗고, 가녀리고, 유약한 이미지를 지녔는데 평전을 읽고 나니 전혀 아니더라요. 그때부터 윤동주의 시를 다시 읽으니 강단이 느껴졌어요. 외유내강, 실천하는 지식인이라는 점이 다시 보이더군요. 시인의 삶도 좀 알면서 시를 읽으면 깊이를 갖고 읽게 되는 것 같아요.


송우혜 씨가 쓴 윤동주 평전(개정판)이 정말 좋아요. 윤동주 시집이 해방 이후 처음 나왔는데 앞 서문을 정지용 시인이 썼어요. 정지용 시인이 윤동주를 몰랐는데, 윤동주의 시집을 낸 윤동주의 친구(신문기자)가 연결해준 거죠. 이것도 송우혜 씨가 밝혀준 사실들이에요. 이걸 알고 나서 시집 첫 서문을 읽는데 눈물이 팍 나더라고요. 정지용 시인이 젊은 시인을 생각하며 얼마나 많은 죄책감과 다양한 감정이 섞여 녹아들었을까 싶기도 하고. 덕분에 이바라키 노리코 같은 분들이 윤동주에 대해 관심을 갖고, 윤동주를 기리는 모임도 만들게 되죠. (에디터 주: 김이경 작가는 후에 <윤동주 평전>이 좋은 책은 맞지만, 일본에서의 윤동주 인기는 일본 문학자의 업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기도 하다며, 그걸 간과하고 말한 부분이 있었다고 보충 설명을 보내왔다. 인터뷰 후에 이렇게 해당 내용을 복기하며 꼼꼼하게 체크하심에 또 한 번 반함)


요새는 시를 읽는 사람만 읽는 경향이 있어요. 저자님이 생각하는 시의 힘은 무엇이며, 시를 읽는 시간의 힘은 또 어떤 걸까요?

이 책을 쓰게 된 이야기가 있어요. 제가 출판사에서 일할 때 너무 스트레스가 쌓이면 마당에 나가서 풀을 뽑거나 곁에 둔 시집 몇 권 중에서 시를 찾아 읽었거든요. 편집자 후배들에게도 늘 시를 읽으라고 이야기했어요. 편집자 일을 하려면 매력적으로 짧게 홍보를 하고, 제목도 뽑아야 하죠. 그럴 때 언어에 대해서 민감해야 하고 언어를 새롭게 구사할 줄 알아야 하는데, 거기에는 시만큼 좋은 게 없기 때문이에요. 


여하튼 그때 같이 일했던 친구가 몇 년 전에 “편집자님 왜 그렇게 시를 읽었어요? 그럼 그런 이야기를 시를 좀 안 읽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세요.”라고 해서 이 책을 집필하게 됐어요. 그 친구 말로는 자기처럼 시를 안 읽거나 매일 읽는 시만 읽거나 처음부터 선뜻 손이 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요. 


처음 시작은 한 줄이 좋아서인데, 꽂히면 점점 시 한 편을 읽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사람들에게 책을 읽으라고 하면 시간이 없다는 대답이 제일 많이 돌아와요. 그 말이 다 맞다곤 할 수 없는 것이, 하루에 시 한 편만 잘 읽어도 되거든요. 같은 시만 일주일 내내 읽어도 되고요. 같은 시를 계속 읽게 되면 생각을 하게 되죠. '왜 이 사람은 이렇게 말했을까?' 시는 짧은 언어로 하나의 세계를 보여주는 거잖아요. 그 시인이 말을 경제적으로 배열하는 데에는 다 의미가 있거든요. 그걸 상상하다 보면 사고력도 깊어지고 상상력도 생기고 언어에 대해서도 민감해지고 다른 사람의 속을 헤아리게도 되죠. 


그런 의미에서 시를 많이 혹은 오래 읽을 필요도 없이, 매일 20분만이라도 시 한 편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는 시간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된다고 봐요. 그게 사회적으로도 도움이 되고요. 광고 잘 하는 분들을 보면 시를 많이 읽더라고요. 시를 적어놓고 적절한 상황에 써먹어도 좋아요. 경제적으로도 손해 보는 일이 아니고 그렇게 힘든 일도 아니죠. 속는 셈 치고 해볼 만한 일 아닌가요?


개인적인 바람은 너무 쉽게 이해되는 시, 똑같은 시만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상상력을 자극하지 못하는 시는 좋은 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건 그냥 산문과 같은데 행갈이만 한 거지. 시는 어떤 식으로든지 말을 응축하고, 굉장히 많은 의미를 한 문장 안에 담은 거라고 봅니다. 생각을 오래 해야 알 수 있는 의미들이죠.


저는 시를 읽을 때 약간의 두려움이 있어요. 내가 뭔가 다른 해석을 하면 어떡하지?라는 마음이랑 비슷한데요. 저와 같은 독자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으실 것 같아요.

제가 시를 쓰진 못하지만 글을 썼을 때를 생각해보면, 저자의 의도와 다르게 읽는 경우들이 있어요. 그게 싫거나 기분 나쁘지 않아요. 오해를 받아서 서운할 때는 있지만. 저도 생각지 못했던 생각들을 누군가 해주는 걸 보면, 신선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요. 시인들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자신이 쓴 시의 모든 의미를 누군가가 정확히 이해해주기만을 바라는 게 아닐 수 있어요. 처음에는 작가가 쓰지만 그다음에는 글이 글을 만드는 경우가 있기도 하죠. 그렇기에 작가도 의도하지 못한 어떤 것을 독자가 발견해주면 오히려 기쁘고 새롭고 자신도 몰랐던 무의식을 만날 수도 있다고 봐요.


무엇보다 독자는 마음대로 읽을 권리가 있어요. 마음대로 읽되, 지금 떠오르는 생각들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김수영의 시를 10대에 읽었을 때와 20, 30대에 읽었을 때가 또 달랐듯이 말이죠. 지금은 이렇게 읽지만, 나중에는 또 다르게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누군가가 다른 이야기를 해도 포용하는 마음이 생겨요. 해석을 두고 싸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어떤 것에 매달려 있을 때는 모든 걸 그것에 맞춰 해석하게 되니까. 오히려 그 해석을 통해 그 사람을 이해할 수도 있지 않나요. 해석의 문을 자유롭게 열어두고 왔다 갔다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시의 문장들>에 있는 시들을 고른 기준은 무엇인가요?

김수영, 기형도 시인을 좋아하지만 일부러 몇 편 안 넣었어요. 참았죠.(웃음) 김수영 시인의 경우 제일 쉬운 시를 넣었어요. 그 무궁한 세계를 보여주기에는 부족하지만... 제가 강연을 할 때에는 김수영의 시 「누이야 장하고나!」의 시 구절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다"를 자주 인용해요. 그런 문장도 뽑고 싶었지만, 그러면 이론적 해석이 곁들여질 것 같아서 제외했죠. 이 책은 일단 시와의 시간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을 위한 거니까 조금 더 사적이고 조금 더 감성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했어요.


평소에 시를 꾸준히 보고 잘 써두는 편이에요. 시집에 표시를 붙여놓기도 하고, 베껴 쓸 때도 있고요. 외국 시도 많이 보려고 노력해요. 우리나라 시와는 느낌이 확 다르거든요. 도서관에 가면 신간으로 들어오는 시집도 챙겨보고 시 잡지도 챙겨 보죠. 아직 시집을 내지 않은 신인 작가 중에서 참신한 시들이 있으면 기억을 해두기도 합니다.


요새 많이 유행하는 SNS 시에 대한 생각은 어떠신지 궁금하네요. 

시라고 하는 게 기발함만 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SNS 시를 보면,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기발함과 재미는 있어요. 하지만 그건 광고 카피나 문구에서도 찾을 수 있죠. 거기서 한 발 더 나가는 것, 세계를 다르게 보게 만들어 조금 더 생각하고 내가 본 세계에 대해 의심하게 만드는 데 까지 가게 해주는 게 시라고 생각해요. 공감에서 더 나아갈 수 있어야 하죠. 이 책에서는 시의 한 문장만 뽑아서 소개를 했지만 시는 사실 한 편을 봐야 해요. 한 편이어야 비로소 완성이 되죠. 짧은 한 구절만 놓고 시라고 하긴 힘들어요. 한 구절로 위대해진 시인은 없어요. 그건 시작일 뿐이에요.


엘리엇의 시 「황무지」에는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구절이 나오죠. 우리가 아는 건 여기까지지만, 그게 왜 잔인한 달인지 설명하는 게 그 이후에 쭉 이어져요. 그 사고를 다 감당할 수 있어야만 시인이 원하는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SNS 시를 통해서 시의 매력을 느꼈다면, 그다음에는 조금 더 긴 시를 읽어보시고, 산문시도 한 번 보시고, 왜 이 사람은 이렇게까지 쓰는지 생각해봐도 좋을 듯해요. 왜 이 사람은 이렇게 쓰나 묻다 보면 '아, 이렇게도 되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되고, 나를 반성하게도 되는 순간도 있어요. 읽는 이로 하여금 여러 가지 사고를 할 수 있게 만드는 시가 좋은 시가 아닐까요.


독서에 대한 각종 방법들이 많은데요. 오랫동안 책을 읽어오고, 책에 관련된 다양한 활동을 해온 저자의 독서교육관이 있다면요? 

저는 '독서교육'이라는 말 자체를 안 했으면 좋겠어요.(웃음) 교육은 어떤 사람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그 과정을 이끌어 나가는 건데, 독서에는 목표가 없거든요. 제 생각에는 그냥 책이 취미가 되면 되는 거 같아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고요. 부모가 책을 읽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어요. 주변을 보면 둘 중 한 분만 책을 가까이하면 아이들도 랜덤이더군요. 많이 읽을 필요도 없어요. 식구들이 집에서 하루 종일 같이 생활하는 건 아니니까.


저는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요. 어른이라는 사람은 항상 무언가를 읽으려고 하고, 읽는 걸 중요하게 여긴다고 생각하며 자랐어요. 어떻게 사회 문제에 그렇게 관심을 갖지 않느냐고 밥상머리에서도 계속 토론을 했고요. 또 행간을 읽지 못하는 걸 굉장히 꾸짖으셨죠. 왜 기자가 쓴 데로 읽느냐, 왜 그렇게 썼을지 생각도 못하면서 읽는 건 읽는 것도 아니라고 엄하게 지적하셨요. 그런 걸 보면서 어른을 존경하는 건 그런 태도에서 생긴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책을 읽으라고 해서 어른을 존경하게 되는 게 아니라, 잘 읽고 열심히 읽고 세상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대응하려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은 어른을 존경하게 되고, 나도 저렇게 커야지 생각하게 되는 게 아닐까요. 그런 면에서 부모들이 아이가 조금이라도 주체적으로 공부하길 바란다면, 부모 스스로 먼저 읽고 고민하는 모습을 아이에게 보여주는 것이 제일 좋아요. 


무조건 아이에게 질문부터 할 필요는 없어요. 부부끼리 같이 이야기만 해도 아이 입장에서는 그 이야기에 끼고 싶어서라도 자기 스스로 찾아 읽으려고 할 거니까요. 요새 어른들은 지나치게 눈높이를 낮춰서 순간순간 아이에게 질문해서 반응을 얻으려고 하는데, 아이와 어른은 다르다는 걸 이해하는 게 먼저예요. 템포도 방식도 달라요. 아이 입장에서 어떤 어른으로 자라고 싶은지 부모가 먼저 보여주는 게 가장 중요해요.


20년 넘게 '글두레 독서회' 활동을 하고 계세요. 함께 모여 책 읽기는 어떤 점이 좋은가요?

일단, 그런 이야기를 나눌 자리 자체가 없어요. 독서회에 오는 분들 대부분이 여성, 그중에서도 주부층이에요. 친구들을 만나 모임을 가지면 맨날 하는 얘기가 남편, 아이, 시댁이죠. 본인들도 그게 늘 재밌는 건 아닐 텐데, 공통분모가 없으니 다른 할 얘기가 없어요. 생활과 관련된 이야기만 하니까. 그런 갈증을 여기 와서 풀어놓으면서 책 이야기만이 아닌 책에 관련된 주제와 엮인 이야기를 하니까 색다른 활력을 얻는 것 같아요. 함께 깊이 있게 토론하는 경험 자체가 드물기 때문이겠죠. '글두레'에서는 한 달에 한 권을 같이 읽고 토론해요. 참여 인원은 보통 10명에서 20명 사이를 오가고요.


책 한 권을 같이 읽어도 내가 읽은 방식과 다른 사람이 읽은 방식이 다른데, 그걸 확인하는 게 참 놀라워요. 사람마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입장에 따라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깜짝깜짝 놀라죠. 선생이라는 입장으로 가지만 저 스스로도 배워오는 게 정말 많아요. 그런 읽기는 혼자 노력해서 절대 발견할 수 없는데 타인이 있으니까 다른 점을 찾아내고 생각하게 만들거든요. 책은 제가 3~4권 추천을 하면, 거수로 정해요. 소설, 인문, 자연과학 등 분야를 다양하게 넓혀가면서 읽고 있는데, 회원들이 힘들어하면서도 이제는 워낙 내공이 쌓여서 어려운 책에도 도전하셔요.


제 입장에서는 새로 들어온 신입 회원들과 기존 회원들의 밸런스의 맞추는 게 조금 힘들긴 하지만, 3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금세 맞춰서 따라와 줘요. 주의할 점은 책 이야기보다 자기 경험 이야기를 늘어놓는 데로 분위기가 너무 흘러가면 안 된다는 것. 기본은 2시간인데 토론이 치열해지면 근처 카페로 옮겨서 더 이야기하기도 해요.


독서회는 모임을 지속적으로 하겠다는 의지가 중요한 활동이에요. 하다가 조금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있으면 안 나오는 경우도 꽤 있죠. 예전에 계시던 분들과는 MT도 가고 밤새도록 이야기도 나누며 서로 개인적으로 힘든 점도 나누는 인생 친구 같은 관계들이 됐는데, 요새는 정보를 얻기 위해 오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지식과 정보 욕구는 많은데 관계를 지속적으로 끌고 가려는 의지는 약하면, 인간관계가 조금만 버겁다 느껴도 그만두게 되죠. 결국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책을 읽는 건데, 관계를 위한 노력을 더 해야 할 필요도 있을 것 같아요.


스스로를 어떤 독자라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쓴 <마녀의 연쇄 독서> <마녀의 독서처방>에서 마녀라는 이름을 가져온 이유가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난 존재라는 의미가 담겨 있어요. 읽을 때만큼은 기존 관념에서 벗어나 주체적 독자가 되고 싶고, 그렇게 읽으려고 노력해요.


사실 저는 잘 반하는 스타일이에요. 책이든 사람이든 그 사람/책이 궁금하고 읽고 싶어 지는. 그런데 막 빠져드는 스타일인 반면 금방 깨기도 하죠.(웃음) 두 번은 읽어야 이 사람에 대해서 균형을 잡는다고 생각해요. 처음엔 반해서 읽고, 그다음에는 거리감을 두고 읽고. 리뷰를 쓸 때도 두 번 정도는 꼭 읽으려고 해요. 반한다는 건 제 마음에 든다는 뜻이기에, 제 시각이 너무 강해져서 그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정확히 읽기보다는 제가 읽고 싶은 대로 읽는 게 굉장히 강하더라고요. 반해서 읽다가 놓치는 부분들이 많았는데, 그다음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읽으면 새롭게 보이는 부분들이 많았어요. 이 사람이 이런 이야기도 했구나, 알고 보니 이 사람 나랑 좀 안 맞네?, 처음엔 별로였는데 읽을수록 괜찮네? 등의 반응도 나왔고요.


저는 마음이 가벼운 독자이지만 또 꼬시기 힘든 독자인 것 같아요.(웃음) 그래서인지 아주 좋아하는 작가를 꼽기가 힘들어요. 한 작가의 모든 작품이 다 좋기는 쉽지 않잖아요. 어떤 작품은 좋은데 어떤 작품은 그냥 그럴 때도 있고요.


독서를 하면서 객관적인 관점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어떻게 하시나요? 가장 좋아하는 작가나 작품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정확하게 읽는 게 제일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리뷰를 쓸 때는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약간 애매했던 부분부터 다시 읽기 시작해서 앞뒤로 읽어 가요. 머리가 썩 좋지 않아서 그런지 이해를 잘 하지 못한 부분을 정리하면서 읽기도 하죠. 정리를 하다 보면 '내가 이해를 못했구나!'라고 뒤늦게 알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무슨 책을 그렇게 골치 아프게 읽냐"라고 해요. 물론 저도 대부분의 책은 한 번만 읽고, 때로는 읽다 그만두는 책도 있어요.


그런데 적어도 이 책이 지금, 이 시기의 나에게 무언가 어떤 답을 건네는 것 같은 책을 만날 때가 있지 않나요. 그러면 그 답이 맞는지 다시 한번 의심해보는 일은 꼭 필요하다고 봐요. 제가 앞서 말한 다시 읽거나 정리하거나 등의 방법으로. '그냥 좋다'는 누구나 느낄 수 있지만, '뭐가 좋은데?'라는 구체적인 질문 앞에 대답을 하다 보면, 내 문제가 무엇인지 보게 되거든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며 왜 이 책을 읽는지부터 아는 게' 먼저예요. 내 인생에서 이 책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계속 질문을 던지며 책을 읽어야죠. 때로는 질문에서 책을 고르기도 해요.


요새(에디터 주: 2016년 3월 말 당시)는 죽음에 관한 책을 집중적으로 읽어요. 십여 년 전부터 관심을 갖고 읽어왔지만, 작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는 죽음의 문제에 더욱 관심을 갖고 읽고 있어요. 톨스토이 같은 경우에도 ‘죽음’이라는 관점에 포커스를 두고 <안나 카레니나>를 읽어 봤어요. 제 안에 그 질문이 있으니까 그것과 관련된 부분이 보이는 거죠. 그런 식으로 여러 책을 찾아 읽어요. 산문-에세이 분야에서는 버지니아 울프, 서경식 작가의 작품들을 질문을 던지며 거듭거듭 읽어요.


소설은 좋아하는 작가는 전작을 읽는데, 카프카나 존 쿠쉬가 그렇네요. 여성 작가들에게도 관심이 많아요. 노벨문학상 받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토니 모리슨 등. 가장 영향을 받은 작품은... 따로 없네요. 그때그때마다 영향을 받은 건 있지만. 요새는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들을 읽고 있어요.


독서 이외의 취미가 궁금해지네요.

몸을 움직이는 걸 좋아해서 춤추기를 한참 했어요. 2~3년간 한국 무용을 배우기도 했는데 요새는 춤출 곳이 없어서 조금 아쉽네요. 산책도 좋아하고. 아, 살아있는 재료의 느낌을 몸으로 느끼는 것을 좋아해서 웬만하면 음식은 집에서 만들어 먹네요.

 

답변들이 다 너무 좋아서 저도 두 번 읽고 싶어요.(웃음) 준비 중인 다음 책 계획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죽음에 대해서 정리를 해보고 싶어요. 제게는 늘 숙제였거든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60% 정도가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하는데, 사실 죽음에 대한 연구가 빈약해요. 수준도 낮고. 죽음은 인생에서 제일 중요하고, 알든 모르든 피할 수 없는 문제기 때문에 '난 몰라도 상관없다'거나 '두렵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어이없는 게 또 있을까 싶어요.


아버지께서 살아계실 때도 서로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죽음 이후는 어떨까, 죽음을 겪으면서 느끼는 건 무엇일까를 죽음과 가장 가까이 계신 분이 들려주는 이야기였죠. 그런 것에 대해 정리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에세이를 쓰고 싶어요.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 editor's comment

그는 늘 내면의 질문을 직시하고, 그 답을 찾기 위한 독서 여정을 떠나는 사람처럼 보였다. 저자를 만난 후 나는 그의 책 <책 먹는 법>도 읽어 봤다. 그 안에는 인터뷰 내내 강조됐던 '질문'이 끌어내는 독서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책과 친해지고 싶은데 너무 멀다고 생각하거나 책을 어떻게, 어디서부터 읽어야 할지 모르겠는 사람이 있다면 추천해주고 싶다. 크기도 부피도 작고 얇아서 독서 여정 가이드로도 손색이 없으니.


인터뷰를 하고 또 하나 느낀 점은, 나 역시 책을 읽으며 얼마나 안일한(?) 마음과 태도를 가졌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내 안에서 둥둥 떠 다니는 수많은 질문을 외면한 채 책을 읽어온 날들. '읽었다'는 행위에 초점을 두고 덮어버린 책들. 내가 읽은 책의 내용을 몽땅 기억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내게 어떤 '변화'를 가져다준 책들이 다시 보고 싶어 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알고 싶어 졌다. 조만간 그 기록을 정리해볼지도 모르겠다.


김이경 작가와는 인터뷰도 너무 좋았고, 그 후에 주고받은 메일, 섬세한 배려와 응원도 참 감사했다. 정말 '어른'의 애티튜드를 갖고 계시는구나, 좋은 글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니구나, 생각했다. 늘 건강하시길, 또 질문을 응시하는 독서에서 나오는 내공으로 좋은 책을 써주시길 바라고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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