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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물 Mar 24. 2022

예술을 이해하면 배움도 늘어난다.

행복을 만드는 작업; 배움을 넘어 문화 욕구를 충족해야 한다.

      

문화예술에 관심이 많이 높아지고 있다. 삶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하고 무언가 하지 않으면 뒤처지는 듯한 사회현상 중 하나일 수도 있다. 아이가 커가면서 부모는 자신의 아이를 보지 않고 옆집 아이를 본다. 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배우는지 열심히 탐문한다. 그리고 뒤질세라 자기 아이에게도 그것을 시킨다. 결국에는 더 많은 것을 아이에게 가르치는 것이 잘되는 것으로 착각한다.    

  

아이는 시곗바늘처럼 아침에 집을 나서면 집에 돌아올 때까지 무수한 기능적 교육을 받게 된다. 그리고 성장해서는 자신이 겪어 온 과정을 다시 아이에게 강요하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전 세대가 자신이 하지 못했기에 아이에게 더 많은 것을 가르치려는 의욕이었다면, 후세대는 너무 많은 가르침을 받았기에 아이에게도 자신의 교육 철학? 을 강요한다.     


지금 살아가는 세대가 함께 겪고 있는 과정이다. 부모는 실망하고 아이는 혼란과 자기 능력을 의심하며 벼랑으로 간다. 그러나 그 잔혹한 아픔을 인식하게 되었을 때는 부모도 아이도 만신창이가 된 이후다. 다시 조금이나마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고 있다. 남이 아닌 내 모습을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남의 아이가 아닌 내 아이를 보며 생각하며 아이가 선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만들어 주려 애쓰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이다.      


여전히 외우고 반복하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AI라는 과학 진보를 바탕으로 다양한 활용 방안이 마련되었음에도 여전한 학습법을 강요하고 있다. 인간이 도구를 이용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외웠는데 현실에서는 그것이 잘 안 되는 것이다.     


왜 우리는 남 보다 잘되어야 하는 것에 집착하는가? 결국, 좋은 직장에 돈 많이 버는 것, 출세라는 멍에 때문이 아닌가. 그러면서 우리는 행복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모든 것을 다 가져야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다. 그런 교육 방법, 교육 때문에 오랫동안 우리 사회는 길들었고 그것을 통해 기계적인 성장을 추구했다. 그것이 곧 성공이다.     





그러나 삶이라는 것이 단순하던가. 육체적, 정신적 해방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결국 문화 욕구다. 세상 밖을 향해 뛰쳐나간 우리들의 90년대 초 모습은 아직도 세계 곳곳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진 문화 탐방 욕구는 결국 또 하나의 경쟁이었다. 누구는 가봤는데 나는 가보지 못한 열등감이 온 가족을 여행 마니아로 가이드화 시키며 곳곳에 흔적을 남기는 역사를 만들었다.      


그러면서 느낀다. 사람들의 삶에 있어 무엇이 행복인지. 잘살고 못살고 가치도 변화되며 그들이(다른 이들) 지닌 가치는 무엇인지. 왜 인정받는지를 생각한다. 빨리 걷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자신의 발걸음을 따라 움직이는 그림자를 바라본다. 두렵지 않다.      


나도 저들의 흔적처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더 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문화도 예술도 경쟁적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 것을 찾아내고 변화시키고 더 좋게 보이도록 만들어낸다. 지금 스스로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우리는 행복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앞서간 누군가보다 더 잘할 수 있기에 우리는 행복마저 창조해낸다.    

  

정신이다. 결국 우리는 이길 것이다. 세계 어느 곳 보다 우리 것이 앞서 있고 더 좋다는 것을 인정하게 할 것이다. 인정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게 할 것이다. 결코 지고서는 살 수 없는 우리 DNA가 있다.       




* 20210615    글 수정 옮김

* 한국미술재단, ArtVerse KAF 아트버스카프 2022년6월호 게재

* 대문사진: Chrysanthemums, 1881, Pierre-Auguste Renoir, 시카고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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