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韓紙로 만든 것은 무언가 깊은 여운이 남는다.
먹을 사용던 종이 찰흙을 사용하던, 그 느낌과 색감이 전하는 감정이 다르다.
한지에 스며든 색의 은은함이 배어있는 깊이가 드러나고 푸근함과 따듯함을 느끼게 한다.
설령 차가운 밤의 색을 느끼게 하는 수묵의 깊이마저 한지에 베어나는 색은 검정이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깊이가 우러난다.
삶에 있어서 강함과 부드러움이 대비되듯 한지가 지닌 고유의 물성物性을 통해 인간 내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던 어느 글처럼, 옛 그림 속 글과 그림이 어우러져 나타내는 그 기운을 통해 의미를 찾아내듯 한지는 다른 무언가를 숨겨두고 있다.
수묵水墨은 색色의 농도濃度를 통해 그 기운을 느끼게 하고 의미마저 담아낸다. 그것은 작가가 원하는 먹의 농도와 빠르고 느림의 기법, 거기에 덧칠 없는 깨끗함이 주는 맛일 것이다. 일필휘지一筆揮之의 붓질을 통해 얻어지는 글자의 한 획에 담긴 깊이처럼 한 번의 붓질에서 드러나는 그 의미는 의도된 작위作爲지만 의도하지 않은 상황까지 포함되어 드러난다.
한지 위에 색을 입히는 것이 아니라 한지 자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활용하는 작업에서도 한지 고유의 특성을 통해 작품의도는 더욱 깊이 드러난다. 닥종이에서부터 완성된 한지까지 무엇을 덧붙이던 그 속에 녹아있는 한지 자체의 숨결은 작품을 더욱 빛나게 하는 그만의 특성을 지녔다.
하얀 백지 위에 나타나는 다양한 색은 어쩌면 종이가 흡수하고 뱉어낸 것들의 자국일지도 모르겠다. 적당히 머금은 후 남는 것은 되돌려 버리는, 한지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만 모든 것을 뱉어내기도 한다. 먼저 받아들인 것에 다른 것을 썩는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거부하기도 한다. 한점 물방울이 닿아 번져 나가는 그 은은한 느낌은 어디에서도 볼수 없는 한지만의 속성이다.
서예에서 느끼는 한지 위의 선들은 면으로 이어져가며 그림으로 변하고 그 그림은 다양한 세상의 색을 받아들여 관객에게 보여준다. 수묵이든 채색이든 한지가 지닌 그 고유의 특성을 제대로 감싸 안을 때 작품은 더 고귀한 존재로 드러난다. 한지가 지닌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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