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은 사람의 마음을 흔든다. 기쁨의 눈물이 아닌 슬픔 가득한 눈물이라면 더 격해진다. 슬픔 가득한 눈물 속에는 전염병 같은 바이러스가 있다. 바라보는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고 함께 끌어들여 슬픔에 빠지게 한다. 그런 슬픔의 해소가 울음이다.
이 작품을 보면 왜 작가는 하필이면 우는 모습을 그렸을까 하는 것이다. 밝고 환한 웃음을 띤 모습이 더 아름다울 텐데 슬픔의 감정 가득한 모습을 담았을까. 어쩌면 작가 자신의 모습을 이런 모습에서 발견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작품은 전반적으로 선을 굵게 드러내어 각진 모습을 하고 있다. 격한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흐느끼는 여인의 감정을 더 강하게 드러내 보이기 위한 것이었을까. 나무통에 앉아 주먹 쥔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우는 여인은 감정이 격해질 대로 격해진 상태일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잃은 듯 모든 것이 허무한 듯 그동안 쌓였던 감정이 폭발해 버린 듯하다.
흑백으로 묘사된 작품이 더 감정을 자극한다. 모든 것을 다 드러내면서도 감추어진 형태를 보인다. 그렇기에 더 강한 인상을 준다. 주변의 모든 사물을 배재하고 오직 여인의 슬픔에만 집중했다. 그럼으로써 여인의 슬픔을 덜어주려는 듯한 것일까.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마지막 순간, 그렇지만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자 함일까. 여인의 슬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드러내고 있다.
삶의 고단함에서 오는 슬픔, 아니면 사랑하는 연인과 관계 때문일까. 작가는 현실 속의 문제를 더 적나라하게 드러내 놓고 보여준다. 여인이 마음속에 지닌 아픔을 덜어냈으면 하는 마음이 담겨 있을 것이다. 어느 순간 저 감정이 사그라들고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릴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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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일부분 확대
이와 비슷한 작품이 있다. 깡마른 여인이 긴 머리를 흩트려 뜨린 채 초라한 모습으로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는 모습이다. 1882년, '슬픔'이라는 작품이다.
고흐는 아이가 둘 달린 매춘부 여성과 결혼하면서 그 여인을 모델로 그린 그림이다. 평생 자신의 후원자였던 동생 테오마저 후원을 끊겠다며 반대했던 결혼이다. 그런 결혼을 했다. 여인과 생활은 3여 년의 짧은 만남으로 끝났지만, 그의 우는 여인 그림은 연민과 동정 같은 깊은 감정이 배어있는 것이다. 1000여 점의 작품 중 평생 단 한 점만 팔았을 정도로 불우했던 자신의 모습을 여인의 아픔을 통해 함께 나누고자 하는 자기 학대 같은 마음이 없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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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작품으로 '의자에 앉아 우는 노인' 작품이 있다. 1890년도 작품으로 노인이 벽난로 옆 낡은 의자에 앉아 주먹으로 얼굴을 가린 채 흐느껴 울고 있다. 머리가 다 빠진 희끗희끗한 머리털과 파란색 옷이 주는 강렬함이 상황을 잘 알려주고 있다.
작품 일부분 확대
하루를 살아가기 어려운 상황일까 아니면 버림받은 노인의 모습일까. 가족을 잃은 슬픔일까. 작품만으로 바라보는 모습은 정말 슬프고 아련한 느낌이다. 고흐는 이런 작품을 여러 점 그렸다고 하는데 얼굴을 파묻은 꽉 쥔 주먹에서 그 감정의 최고에 달해 있음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는 왜 남녀를 불문하고 주먹 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작품을 그렸을까.
자신의 처지에서 바라본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꼭 일어서겠다는 다짐 같은 것이 내포되어 있지 않을까. 지금은 울고 있지만 언젠가는 일어설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나약한 여인, 노인의 모습이지만 그래도 남아있는 여력이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고흐가 마지막까지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었던 욕구, 그것은 자신에 대한 애착愛着이다.
위 그림들은 작가 자신의 상황을 작품에 투영하여 보여주고자 하는 마음이 강하게 느껴진다. 더 이상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다.
결국 그림이란 자신의 감정, 타인의 감정을 바라보며 잘라내고 덧붙이고 상상하고 하면서 만들어낸 픽션이다. 그 감정의 조화를 어떻게 드러내는가. 자신의 관점에서 드러내 놓고 관객의 관점에서 바라봐 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압축과 늘림의 미학, 잘 손질된 감정 청소의 미학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