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흐르는물 Mar 20. 2024

우상호 작가의 아프리카 여행

생명, 순환, Georgia O’Keeffe



우상호 the crying of Africa. 60*45.5, acrylic on panel, 2024



2023년 한국미술재단 화가들과 아프리카 여행 후 그린 작품이다. 아마도 자연공원 safari 관람 후 본 모습을 그렸을 듯싶다. 자연 속에서는 힘이 우위다. 먹이사슬을 이루는 층계에 의해 먹고 먹히며 그 생존을 이어간다. 작품은 그 사실적이고 상징적인 묘사를 통해 아프리카를 보여준다. 아마도 사파리에서 본 자연의 모습 중 가장 기억 속에 존재하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생명이라는 존재에 대한 허무와 소중함 같은 것에 대한 경외스러움 일수도 있을 것이다. 자연공원에서 보호받으며 살아가는 동물들이지만 그 속에는 나름의 자연법칙이 존재하고 그것은 인간이 관여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것을 입증하는 것이 바로 저 두개골일 것이다.


광활한 아프리카의 자연공원에서 바라보는 동물은 아름답고 멋있는 자연의 하나다. 그러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위험 때문에 인간은 좁은 차량 안에서 그 풍경을 바라만 보는 것이다. 내가 그 땅을 밟고 내려서는 순간 그 야생의 경쟁 속에 들어서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호 장치를 통해 그 풍경을 바라보면 그 속에 살아가는 동물을 통해 자연을 배운다.


처음 이런 동물뼈를 보면 섬뜩하지만 여기저기서 그러 모습을 본다면 둔감해질 것이다. 아니 자연이라는 존재 법칙에 자신도 순응하는 마음이 일 것이다. 인간도 하나의 먹이사슬에 놓인다면 아주 약한 부분에 놓인다. 그나마 도구를 통해 가장 강한 존재의 하나로 군림하는 것일 뿐이다. 이런 자연의 법칙은 자연 앞에 생명이 얼마나 나약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어쩌면 당연한 삶의 과정인 것을 너무 한쪽만 바라보는 인간의 편협된 시각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소는 경쟁에서 짐으로써 자신의 모든 것을 포식자에게 제공해야 한다. 그리고 남은 것이 저 뼈다.


그림은 아프리카를 알리는 부분적인 글자가 보이는 간판 위에 소 두개골이 놓여있는 풍경이다. 하얀색을 띤 두개골과 간판과 대비되는 파란 하늘이 광활한 자연 속에 있음을 알리는 듯하다. 마치 여기서는 자연의 법칙으로 돌어가니 스스로 생존을 모색하라는 경고판처럼 보이지 않는가. 작가는 그림 속에서 직접적인 죽음을 보이지는 않지만 하얗게 변해버린 소의 두개골을 통해 그 시간성을 드러내며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이 입간판에서 바라보도록 시선을 유도했다. 위 아래로 분할된 구도는 삶과 죽음, 자연의 실상을 드러내듯 명확한 선을 형성하고 있어 더 단순해 보인다.


작가의 그림 여행은 여기가 시작이고 마지막이 아니었을까. 삶과 죽음이 존재하는 경계의 선에서 세상을 바라다본다. 가장 무거운 생 과 사 의 의미를 이렇게 아름답게 또는 해학적인 모습으로 표현해 보여주는 것도 쉽지 않을 듯하다. 그것은 가볍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진중한 의미를 좀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여유로움이 아닐까.


 이 작품을 보면 꽃과 사막의 화가로 불리는 Georgia O’Keeffe의 Cow’s Skull with Calico Roses, 1931, 작품이 생각난다. 하얀 백화 된 소 두개골과 하얀 장미가 인상적이었다. 작가가 죽음을 애도하듯 그려놓은 두개골과 하얀 장미는 매우 특이한 조화를 이루는 궁합이다.



생명에 대한 가장 존중의 한 방법같이 느껴졌다. 작가는 현장에서 두개골을 보고 그 두개골을 가져와 접 그렸다고 했다. 그만치 남아 있는 생명의 존재가 아닌, 그 흔적에서 생명을 찾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기에 백골이 된 소 두개골에 죽음의 상징인 하얀 장미를 그려 넣었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생명을 다했지만 그 죽은 이후의 세계에 대한 신비 그리고 생명에 대한 존귀한 마음의 표시를 드러내었다.


그녀의 그림에서 소의 두개골은 가장 아름다운 자연물의 하나다.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두개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막에서 모래바람에 씻기고 탈색되어 낡을 데로 낡아버린 마지막 석화의 모습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찾아내었다. 눈이 있던 자리에 장미를 넣었고 입이 있는 부위에 장미를 놓았다. 가장 추하고 거부감을 느껴야 할 굴러다니는 뼛조각에 장미 두 송이가 아름다움으로 미화했다. 그녀는 꽃을 그리듯 자연 속의 사물을 특정 부분만 확대하고 더 깊이 들여다 봄으로써 자연 아름다움을 찾아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죽음조차도 그 속에서 아름다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자연에 동화되어 살아갈 수 있을 때 가능할 것이다. 의식과 무의식 세계에서 바라보는 자연이야 말로 가장 아름다운 공간이 아니겠는가. 누군가에게는 죽음이 공포스럽고 두려움의 존재처럼 다가온다면 누군가는 그 죽음마저 자연의 일부분으로 자연으로 돌아감을 축복하듯이 말이다.



https://brunch.co.kr/@flowjeon/50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