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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상실 시대 -그들은 누구일까.

by 흐르는물


현대의 잘난 사람, 출세한 사람은 누구일까. 모두가 똑똑한데 그중에서 더 뛰어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요즘 아이들 참 큰일이다. 버릇없다'는 말은 사회가 구성되면서부터 시작된 단어일 것이다. 그렇지만 요즘 그 차이가 너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자기만 아는 행위를 하는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 같지 않은 나이 든 사람도 늘어난다. 듣지 않고, 말만 하고, 권위를 앞세우며 “내가 나이 많으니 존중하라”라고 요구한다. 어른다움이 사라진 자리에 나이만 든 미성숙한 인간이 남았다.


부모의 관용아래 아이는 점점 자기만 아는 사람으로 크고 어른의 자리에 이르고 있다. 경쟁만 알고 타협과 배려를 가르치고 배우지 못했다. 어느 자리에서나 자신이 앞에 있어야 하고 무조건 이겨야만 하는 사람이 되었다. 나만 잘 되면 된다”는 생각이 일상의 신조가 되었다. 그렇게 키워졌다. 그 결과는 로봇 보다도 못한 지식만 머리에 담고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들은 자신이 옳다고 정당성을 지녔다고 믿으며 끼리끼리 어울리고, 울타리를 세워 자신들만의 왕국을 만든다. 그 울타리 안에서는 정의가 사라지고, 타인의 고통은 보이지 않는다. 머리는 똑똑하지만 마음은 텅 빈 사람들, 지식은 넘치지만 지혜는 사라진 사람들의 모습이다..


학교, 지역, 돈, 권력, 집안 등 자기들만의 기준을 만들어 사람을 나누려 한다. 온갖 틀 속에서 권력을 탐하고 자기들만의 세상을 즐긴다. 권력을 가진 자는 돈을 탐하고 돈을 가진 자는 권력을 탐한다. 그들은 서로의 세력을 키우며, 그 길의 밑바닥을 국민이 대신 받쳐 들게 한다. 정의와 배려는 사라지고, 쟁취와 독점만 남았다. 그들이 만든 사회는 겉으론 화려하지만, 속은 비어 있다. 이 땅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한 이들은 잊히고, 도리어 그 희생 위에서 이익을 누리는 자들이 곳곳에서 자유를 말한다. 그것이 지금 이 국가를 이끌어간다고 하는 사람들의 수준이다. 정말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머리가 좋고, 돈이 많고, 좋은 학교를 나왔다는 이들이 넘쳐난다. 그런데도 사회는 왜 이토록 불안할까. 모두가 ‘자신은 정상에 서야 한다’고 믿는 사회, 그래서 서로를 끌어내리고 견제하는 사회가 되었다. 그 잘난 사람들이 만든 세상은 그들만의 무대가 되었고, 나머지 대다수는 들러리로 남았다. 모두 함께가 아닌, ‘나만을 위한 존재’로 살아가는 이들이 늘어났다. 법을 말하지만 법 위에 서고, 국민을 말하지만 국민 위에서 이용한다. 그들은 권력을 위해 도덕을 버렸고, 책임을 져야 할 자리에 앉아서 욕망을 채웠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선포와 탄핵, 그리고 그 심판의 과정에서 권력 중심에 서있는 사람들이 보이는 행동은 비민주적이고 사리와 논리에 맞지 않는 행동으로 가득 찼다. 그것이 바로 배운자, 머리 좋은 자, 권력자의 행패이자 치부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치부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한점 부끄러움 조차도 없다. 도덕성이 제로인 인간 타락의 가장 비극적인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법을 말하며 그 법을 자신에게 맞추고자 한다. 국민을 말하지만 국민을 아래에 놓고 방패로 생각한다. 국민은 그들에게 믿음을 주었지만 그들은 배신의 총부리를 들이밀었다. 우리는 몰랐다. 그들이 정의라고 생각했고 국민을 위해 일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위해 그 자리가 필요했을 뿐이다. 탐욕을 채우기 위해 국민의 피눈물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한다. 진정 잘난 사람이 누구인가. 지식을 쌓은 사람인가, 아니면 양심을 지킨 사람인가. 지금 이 사회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엘리트가 아니라, 조금 더 인간다운 어른이 있는 사회다. 듣고, 배려하고, 양심에 따라 말하는 사람이다. 그런 이들이 많아질 때 비로소 머리는 밝고 마음은 따뜻한 사회가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똑똑한 머리보다 더 필요한 것이 타인의 고통을 알아차리는 마음이다. 그것이 진짜 이 사회의 어른이 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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