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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o Feb 07. 2020

꿈에서라도 보고 싶은 너를 만났다

MBC 스페셜 특집 VR 휴먼 다큐멘터리 "너를 만났다"

며칠 전부터 sns와 애엄마들 사이에서 회자되던

TV 프로그램 예고편이 있었다. 바로 mbc 스페셜 특집

VR 휴먼 다큐멘터리 "너를 만났다"이다.

대부분의 반응들은 "본방송을 볼 자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 역시 예고편만 봤는데도 목이 칵 다 못해 뒤통수까지 저릿저릿한 것이 과연 내가 본방송을 제대로 볼 수 있을까 싶었다. 본방송을 하는 목요일, 목요일만 뇌리에 남았고 목요일이 왔다.

서둘러 살림을 끝내고 아이들을 재우고 씻는다고 하긴

했는데 씻기 전 틀어놓고 간 TV에는 이미 다큐멘터리가 시작해버렸고 급한 마음에 방에서 잡히는 대로 들고 나온 화장품을 펴 바르며 본 첫 장면은 막내가 언니가 있는 납골당에서 뛰어다니는 장면이었다. 예고편에서 본 아이, 그러니까 하늘로 간 나연이랑 똑 닮은 막내였다.

어느 아침 잠에서 일어난 따뜻한 막내 아이의 몸을 안아보고 가슴에 귀를 대고 심장소리를 듣는 엄마의 얼굴에 사랑과 안심이 가득했다. 그녀는 진심으로 아이의 무사하고 무탈한 행복한 아침을 감사하고 있었다.

곧 둘째가 열이 나서 엄마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고 의사에게 동생의 혈액암 전적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남은 아이를 지키기 위한 필사적인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마음속은 불안과 두려움에 떨었을 텐데 덤덤하게 말하는 것이 짐짓 간절해 보였다.

네 남매 중에 누구보다도 건강했던 셋째가 열이 떨어지지 않아 큰 병원으로 갔을 때 혈액암을 판정받았다. 엄마는 아마도, 큰 아이들을 키워보며 열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이다. 나도 그러한 편이다. 그래서 그녀가 마주해야 했던 믿을 수 없는 현실을 생각하니 끝도 없이 막막해지는 기분이었다.

다 나아서 함께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라 믿었겠지만 아이와는 같이 돌아갈 수 없었을, 집으로 가는 길을 상상해보았다. 하루아침에 엄마와 아빠는 북적대던 네 명의 아이 중 하나를 잃었고 남매들은 함께 부비적거리며 뛰놀던 형제를 잃었다.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상실을 버텨내는 힘겨운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가족들은 나름의 모습으로 하늘로 간 아이를 기억하고 있었다.

든든한 맏이인 첫째가 동생을 생각하는 마음은 각별했다. 이미 중학생이 되어버린 첫째의 기억 속에 남은 착한 동생.

지난 영상 속의 오빠와 셋째는 더없이 익살스럽고 개구졌다. 매 순간 울고 웃으며 만들었을 추억이 맏이에게는 행복한 기억임과 동시에, 떠올리면 가슴이 아픈, 엄마와 아빠의 심정과 가장 비슷한 마음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둘째인 언니는 두 살 터울의 여동생과 쌍둥이처럼 어울리며 여느 자매들처럼, 어떤 친구보다도 가까운 사이었을 것이다. 아직 어린 막내와 하늘로 간 동생 대신 엄마의 곁에서 친구처럼, 누구보다 엄마의 슬픔에 동감하고 있었다.
동생을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나지만 그런 슬픔을 숨기지 않고 담담하게 견뎌내는 의젓함이 엄마의 아픈 마음을 잘 다독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막내는 아기였을 적 언니와의 기억을 제법 잘 간직하고 있었다. 언니와의 시간은 너무나 짧았지만 하늘로 간 언니가 계속 가족과 함께인 것처럼 가족이 여섯 명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언니가 하늘로 간 나이인 일곱 , 언니와 똑 닮은 얼굴의 막내가 언니를 마음속에 새기 방법이다.

남은 남매들을 키워야 하는 엄마는 문득문득 가슴에 묻은 아이가 생각이 난다. 곁에서 조잘거리는 아이들을 보면서도 하늘을 보면서도 매 순간 아이에 대한 그리움은 잊은 듯하게 옅어졌다가 다시 진해진다.


남은 아이들은, 가슴에 묻은 아이만 오롯이 그리워하는 것을 방해하기도 하고 잠시 쉬어갈 만한 그리움을 다시금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남은 아이들이 있어 엄마는 살 수 없어도 살아야 한다. 당장이고 가슴에 묻은 아이에게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다.
가서는 안 된다. 엄마에게는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못해준 것, 더 해주고 싶은 것이 많을 것이다. 그것이 가슴에 사무쳐 버리지 못했던 아이의 물건들을 태우며 엄마는 오히려 아이에게 미안하다. 어린아이도 엄마를 떠나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엄마는 미련이 남아서 그런 아이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아이의 모습을 재현해내기 위해 표정과 움직임을 만드는 작업을 보면서 아직은 어색하고 조악한 이 기술이 더욱더 발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환영에 불과한 허상이다. 그래서 엄마가 VR이 시작되고 재현된 아이를 보면서 손을 허우적대며 아이를 만지고 싶어 하던 것이 처절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꿈에서라도 만나고 싶었던 아이였다.
엄마는 그렇게, 꿈에서라도 만나고 싶었는데 아이는 꿈에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헤어질 때 그 모습 그대로의 아이가 눈 앞에서 나를 보고 있으니 그것은 결코 우스운 장난을 하는 것이 아니다. 엄마는 적어도 그렇게 그리던 아이를 마주하고 있다. 그렇게 그리워하던 아이를 진짜로 만난 것처럼 눈물이 흐른다. 그리고 이젠 아프지 않고 더없이 예쁜 모습으로 편안해 보이는 아이를 보며 엄마도 편해지겠노라고 약속한다.

잠들듯이 사라진 아이와 또다시 이별을 하며 아쉬움에 슬픔이 밀려올 틈도 없이 남은 아이들이 말간 얼굴을 한 엄마의 품에 안긴다. 엄마는 다시, 아이를 만날 수 없는 현실로 돌아간다. 그 현실에는, 밝은 모습으로 살아 숨 쉬는 아이들이 있다. 엄마는 다시 웃을 수 있고 가끔은 여전히 가슴에 묻은 아이를 그리워할 것이다.

남은 아이들이 있어 엄마 아빠에게는 천만다행이다. 남은 아이들이 없었다면 엄마 아빠는 더 깊은 슬픔 속에 더 오랫동안 잠겨져있어야 했을 테니 이것은 잔인하리만치 분명한 사실이다.

오랜만에 개운하게 울어 멍한 머리로 이미 다른 프로그램이 시작된 TV 앞에 앉아있다가 퍼뜩 TV를 끄고 아이들 방에 가서 새근새근 잠든 아이들을 한 명씩 꼭 안아주고 방문을 닫았다. 오늘 밤만큼은, 왜 넷씩이나 낳아서 이 고생을 하고 사느냐는 마음을 접고 잠자리에 들었다. 새근거리며 잠든 아이들의 몸이 따뜻했기에, 그걸로 되었다고. 무척이나 감사하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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