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어머니, 나의 할머니
코로나 시국에 장례를 치르다
여느 날처럼 아이들과 정신없이 부대끼는 오전 시간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지나고 나서야 돌이켜보건대, 약간 트라우마처럼 남겨진 자국 같은, 그 느낌.
작년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고 나서는 한동안 엄마의 전화가 낮이고 밤이고 두려웠다.
한 템포 쉰 후, 얘, 하며 말을 꺼내는 엄마의 목소리에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퇴임하시고 대부분의 시간을 할머니 돌보는 데에 쓰셨던 아빠는 코로나 때문에 3개월간 요양병원에 계신 할머니를 뵈러 가지 못하셨다. 하루가 멀다 하고 할머니를 보러 가시다가 그러지 못하는 시국에, 아빠는 애가 닳았다.
그러다 할머니는 급격히 상태가 안 좋아지셨고 병원 측에서 가족들을 불렀다.
그리고 그날 아침,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하루 종일 무슨 정신으로 아이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했는지 몰랐다. 여느 날과 다를 것 없이 아이들을 먹이고 치우고 가르쳤다. 간간히 웃기도 했다. 핸드폰을 들었다 놓았다 했다. 아빠가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아빠에게 건넬 수 있는 위로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일찍 일을 마친 남편은 먼저 장례식장에 갔다 와서 아이들을 맡았고 나는 아이들이 잠들 시간에 혼자 집을 나섰다.
이튿날 입관을 할 때 터져 나오는 울음들 사이에서, 고모는 울먹이며 말했다.
"엄마, 우리가 엄마를 그냥 내팽개쳐둔 게 아니야, 코로나 때문이었어.. 그래서 엄마한테 갈 수가 없었어.."
오랜 시간을 불편한 허리와 다리로 버티셨던 할머니의 무릎은 구부러져 있었다. 억지로 펴면 부러질까 봐 그냥 두었다며 염을 하는 이는 깡마른 할머니의 몸을 몹시도 단단히 여몄다.
할머니가 들어가신 관을, 아빠는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이리저리 바쁜 사람들 사이에서, 아빠는 혼자 빈소에 앉아계셨고 나는 그런 아빠를 바라보았다.
내가 셋째를 낳고 힘든 육아에 치여 살 적에, 거동이 힘드셔서 집에서 누워만 계셨던 할머니는 수첩에 적어놓은 연락처의 주인들 중 하나인 내게 전화를 하셨다. 하필이면 셋째 재우고 나도 눈 좀 붙여보려고 할 때 꼭. 그게 귀찮아서 몇 번은 전화를 안 받은 적도 있다.
그 해 명절에, 할머니는 우리 셋째를 안아보셨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나는 할머니를 잃었고 아빠는 어머니를 잃었다. 슬픔을 비할 바는 없을 것이다. 70을 바라보는, 백발이 성성한 아빠도 하늘 아래에 부모님이 더 이상 계시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일상으로 쉽게도 돌아왔고 때로 아빠를 떠올리고 걱정한다. 카톡으로 아빠가 걱정되니 몸 상하지 않게 힘내시라고 던지듯 말을 뱉어놓고, 잘 알겠다며 고맙다고 말씀하시는 아빠를 보며 염치없게도 조금 안심했다.
할머니는 구부러진 허리를 곧게 펴고 새털같이 가벼운 걸음으로 할아버지 곁으로 걸어가셨을 거다.
할머니, 안녕히 가세요.
그리고 할머니의 큰 아들인 우리 아빠를,
그곳에서도 꼭, 돌봐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