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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o Jul 01. 2020

굽은 등을 펴고

대학교 2학년 때였다. 학회 행사를 끝내고 집에 가는 길에 선배 차를 얻어 탔는데 빗길에서 5톤 트럭이 우리를 들이받았다. 육안상 다친 곳은 딱히 없었는데 선배의 차는 폐차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철없던 우리는 아니 나는 그냥 돈 몇십만 원에 합의를 해버리고 동네 병원에 나이롱환자로 입원해서 밤에 술을 마시나가거나 노래방을 가며 며칠을 보내다가 퇴원했다.

몇 년 후엔 미국에 배낭여행을 가서 상 그지같이 굶고 햇볕 아래에서 종일 걸었다가 숙소 2층 침대에서 현기증으로 떨어져 엉치뼈에 금이 가서 급히 귀국을 했다. 재활치료를 받아야 했는데 별로 아픈 것 같지도 않고 놀기 바빠서 치료를 나가는 둥 마는 둥 했다.

그 이후로 지하철에서 손잡이를 잡고 서 있기만 해도, 또는 비가 올 것만 같은 궂은 날씨에는 더욱더 허리와 등에 통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20대 창창한 나이에 그다지  신경 쓰일만한 것은 아무래도 아니었다. 아무래도 덜 아팠던 거겠지.

아이를 낳고서는 어깨와 등을 움츠리고 아기에게 젖을 물렸다. 내 맘처럼 젖을 빨아주지 않는 아기에게 땀을 뻘뻘 흘리며 젖을 물리려고 허리와 등을 온통 구부렸다. 쪽쪽 젖을 빠는 아기를, 고개와 목을 비스듬히 꺾어 바라보다 쓰다듬었다. 그렇게 젖을 물린 채로 구부정하게 앉아 멍하니 TV를 쳐다봤다. 그 짓을 잊을만하면 또 하고 또 했다.

나빠진 자세로 운동과는 거리가 먼 생활이 계속되며, 언젠가부터는 허리와 등에 못 견딜 통증이 있었지만 출산을 거듭하며 꾸준히 축나기 시작한 몸에 미안한 줄도 모르고 그러려니 버텼다. 그러다 넷째를 낳았고 마지막 몸조리를 하고자 조리원에 들어갔다.
마사지숍 원장이 첫날 내 등을 보자마자 못 볼 걸 본 것처럼 소리를 질러댔고 나는 내가 뭔가 큰 잘못을 한줄만 알았다.


나더러 엎드려보라더니 내 등의 사진을 찍었고 호들갑을 떨며 사진을 보여줬다. 사진 속에 내 등은 꼽추처럼 둥글게 굽어있었다.

아기들을 낳고 이상하리만치 옷빨이 안 받았던 건 비단 살이 쪄서 뿐만이 아니라 등이 심하게 굽어서였다.

아무튼 마사지숍 원장의 영업 아닌 영업에 마치 마사지를 안 받으면 내 몸에 죄를 짓는 느낌이 들어 조리원 있는 내내 마사지를 받았고 조리원을 나와서도 출장마사지를 불러 받았다. 내 몸을 보는 그들은 하나같이 등이 많이 굽었다는 소리를 매번 했고 신경 써서 관리를 해주는 듯했다.


그러나 그런 값비싼 손길도 계속 취할 수 있는 호사는 아니었고 다시 내 몸은, 아이를 먹이고, 안고, 재우며, 틈틈이 살림을 해내야 하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체력도, 근력도, 면역력도 모두 떨어진 상태로, 내 몸의 어떤 것도 그 고된 일상을 받아들일 준비는 되지 않은 채였다.


네 아이를 키워내며 사는 것은 보통의 일이 아니었다. 나는 때때로 탈진 비슷한 것이 느껴질 때 즈음 쇼파건, 침대건, 바닥이건 벌러덩 드러누워야 할 필요가 느껴질 때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쇼파에는 아이들이 나란히 앉아 TV를 보고 있고, 단정히 정리된 침대에는 땀에 절은 몸을 뉘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 선택은 바닥뿐이다. 그렇게 딱딱한 바닥에 누우면, 나름의 관리를 받았어도 여전히 굽어있는 등이 바닥에 닿는 순간 묵직한 통증이 숨을 턱 막히게 했다.  체중이 실린 나의 굽은 등은 평평한 바닥에 닿는 것을 온 힘을 다해 거부하는 듯, 지쳐서 꼼짝을 못 하겠는 몸을 기어이 다시 옆으로 눕혔다.


고단한 하루가 끝나면 남편은 내 목과 어깨, 등을 주물러 주곤 했는데 어느 날부턴가 등을 자꾸 쓰다듬으며 걱정했다.

아무리 오랜 시간 안마를 해줘도 좀처럼 나아지는 것이 없자, 어느 날은 몰래 한의원에 예약을 했다. 고마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이가 하나, 둘, 셋이었을 때 시간을 내어 주기가 지금 보다야 조금은 더 쉬웠을 텐데도, 왜 이렇게 아프고 못나버린 등을 갖게 된 이제야, 라는 얄궂은 원망도 했다. 남편만을 원망했던 것은 아니었다. 내 몸에 생긴 문제점을 제기하려는, 나아지려는 의지도 없는 채로 그저 그냥 둘 뿐, 그렇게 변해가는 내 몸을 그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방관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


어쨌든 나는 처음으로 한의원에 가서 추나치료를 받았다. 젊은 남자 한의사의 손길이 생경했으나 그런 것도 잠시, 무언가 어긋난 것이 분명한 것 같았던 뼈들이 맞춰지는 느낌과 아이 넷을 남편에게 맡겨두고 혼자서 걸어가는 몇 분간의 홀가분한 걸음을 즐기게 됐다. 남편은 일주일에 꼭 두 번씩은 치료를 받으러 가게 해주었고 치료를 받은 날은 무리하지 않기를 바란다며 내가 집을 비운 사이 집안을 깔끔히도 치워주었다. 감사한 일이다.


난생처음 부황도 떴다. 예전에 목욕탕에서 본 그녀들의 둥그렇고 넓은 등에 있던 뻘건 멍자국이 내 등에도 나란히 생겼다. 더워서 민소매를 입은 내 등을 아이들이 보고 아프겠다며, 어디서 다쳤냐며, 걱정 가득한 얼굴들을 했다.


몇 주간의 꾸준한 치료를 받으며 확실히 등의 통증은 나아지고 있고 나는 의식적으로 자세를 더 바르게 하려고 노력 중이다. 한의사의 말처럼 기지개를 자주 켜서 등을 펴고 아이의 입에 먹을 것을 밀어 넣어 주는 순간에도 구부정한 자세를 하려다 퍼뜩 곧게 앉곤 한다.

맨바닥에도 그럭저럭 누울 만하다. 걸음걸이도 왠지 가벼워졌다. 거울에 비춰보는 등이 조금은 평평해졌다. 그것으로 기분은 한껏 나아진다.

치료는 계속 받을 생각이다. 남편도 그러길 원하고 처음 한의사의 조언대로 스트레칭이나 운동도 겸할 생각이다.  


삶의 무게는 언제나 어깨 위에서 우리를 지그시 누르겠지만 아직 젊고 해야할 것이 많은 몸살펴야 한다.

우리는 등을 꼿꼿이 펴고 매일을 살아낼 의무가 있다.


등에 새겨진 부황자국이 옅어졌다. 가벼운 걸음으로, 한의원에 총총 걸어갈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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