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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o Sep 11. 2020

라면 한 그릇과 무말랭이

Feat. Guilty pleasure

지난밤에 막내 녀석이 크느라 몸이 고된지 거짓말 조금 보태  10분 간격으로 끙끙대며 통 못 잤다. 어느새 열대야의 나날들은 지나갔고 손가락 틈새만큼 열어놓은 창문에서 찬바람이 들어오면 마침맞게 쾌적한 잠자리인데도, 세네 시간 동안 몸을 배배 꼬며 보채는 녀석을 달래려니 번열증 비슷한 것이 치밀어 올랐다. 결국 창문을 다 열어버린 채, 날이 밝으려는 채비를 할 때 즈음 나도 녀석도 깊은 잠이 들었다.


어김없이 아침이 왔고 아이들 방에서 재잘재잘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밤새 잠을 잔둥만둥한 것은 막내 녀석이나 나나 마찬가지인데도 형아들 목소리가 들리자 눈을 번쩍 뜬다. 자는 시간만 떨어져 있을 뿐인데 녀석들은 서로가 무척이나 반가워 볼을 비빈다.

자기들끼리 좋아 죽겠다며 꺄륵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벌러덩 누워있자니 몇 번이나 까무룩 잠이 들어버리기도 했다.


맑은 정신이 쉬이 들지 않지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큰 아이가 온라인 수업을 하는 동안 둘째는 형 옆에서 같이 책을 펴고 앉았고 어린이집에도 못 가고 형들하고 놀 짬도 안 되는 셋째는 혼자서 블록을 달그락거렸다. 그러는 동안 막내에게 아침밥을 서둘러 먹이고 나머지 아이들의 아침밥을 준비했다. 얼추 먹이고 나니 쌓여있는 설거지 거리와 바닥에 떨어진 빵가루와 밥알, 반찬 같은 것들이 눈에 띈다. 이상하게도 급격히 떨어지는 기운에 나도 당장 뭔가 먹어야겠기에 국그릇에 시리얼을 말아 싱크대에 서서 먹으려다가, 거실에 있는 아이들을 슬쩍 피해 아이들 방으로 가서 아직은 말간 하늘에서 불어오는 살랑바람을 맞으며 우적우적 씹어먹었다.


빨래를 널고 설거지를 하고 빈속으로 회사에 간 남편에게 미숫가루를 타서 갖다 준 다음 집에 들어오니 오전 중에 해야 할 일들은 대강 마친 것 같았다. 낮잠 잘 시간이 된 막내는 내게 손을 뻗어 재워달라고 눈으로 말했다. 그렇지, 요 녀석. 피곤도 하겠지. 나도 눈 좀 붙여볼 심산으로 같이 누웠다.


한 시간 여 잤나 보다. 날은 오전보다 많이 흐려져있었고 아이들은 알아서 노는지 여전히 툭탁툭탁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막내도 잠에서 깼다. 늦은 점심시간이다. 고맙게도 아이들이 며칠 전 만들어 얼려놓은 카레를 찾길래 뚝딱 다시 끓여 한 대접씩들을 줬다.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막내의 몫은 좀 식혀둘 겸 두고 돌아서는데 별안간 라면이 무척이나 먹고싶어졌다.


라면이 평소에 막 당기는 음식은 아닌데 얼마 전 반찬가게에서 사둔 무말랭이가 너무 맛있어서 언젠가 라면을 끓여 같이 먹어야지 했던 게 바로 딱 지금이야, 하는 신호 같은 것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울리는 기분이랄까. 얼른 물을 받아 라면 하나를 꺼내어 끓였다. 계란 같은 것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지극히 이성적인 양의 라면 한 그릇과 무말랭이를, 아이들이 밥을 먹고 있는 식탁에서 왠지 모르게 멀찌감치 떨어뜨려놓고 싶어 싱크대에 올렸다. 다행히 호시탐탐 라면을 먹고 싶어 하는 큰아이는 눈치를 못 챘고 나는 한껏 거룩한 마음으로 한 젓가락을 떠 빨간 무말랭이를 올렸다.


상상했던 맛보다 훨씬 좋은 맛이었다. 라면은 평소보다도 더 잘 끓여졌고 무말랭이는 관자놀이까지 꼬득거림이 전해져 울렸다. 비록 싱크대에서 먹고 있는데도 만족감이 가득 차올랐다. 라면을 뜨고 무말랭이를 올리는 반복적인  젓가락질을 거듭하면서 방금 새로 했지만 아이들에게 가득 퍼주고 나니 반 공기밖에 남지 않은 밥이 절실했다. 바닥을 드러내는 라면을 보며 밥통속의 밥에게 속삭였다. 곧 만나.


남은 국물에 밥을 말아 이번엔 밥 한 숟가락에 무말랭이를 올렸다. 이것은 또 이것대로 너무 맛있었다. 흐뭇하게 저작하는 동안은 찌꺼기처럼 남은 감정과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이 잠시 희미해졌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허락을 구할 새도 없었다.


라면 한 그릇과 밥 반 공기 그리고 무말랭이 한통을 남기지 않고 먹고 나니 다시 언젠가 라면을 끓여서  이 맛있는 무말랭이와 함께 먹는 날이 온다 하더라도 이만치나 맛있게 먹을까 싶어 졌다. 


인스턴트 라면에 성분도 모를 반찬가게의 무말랭이가 길티 플레져(Guilty pleasure)가 돼버린 한 끼의 식사였다.


어느새 식사를 끝낸 큰 아이가 다가와 나도 라면 먹고 싶다며 이미 두둑한 배로 입맛을 다신다. 아들 몰래 먹은 꼴이 되어서는 괜스레 겸연쩍어지는 손길로 재빨리 먹은 흔적을 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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