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o Nov 01. 2020

선생님, 지문이 안 읽히는데요

할머니와 같이 살 적에 우리 집은 바닥에 먼지 한 톨이 없었다. 할머니는 항상 손바닥으로 사방의 먼지를 죄다 쓸어 모았다. 제 아무리 비싸고 좋은 청소기가 있어도 할머니에겐 무용지물이었다. 할머니는 그렇게 온 집안을 손바닥으로 쓸어서 모은 머리카락과 먼지 뭉텅이를 손바닥에 차곡차곡 모아 쓰레기통에 넣고 두 손을 탁탁 털었다. 그렇게 할머니가 쓸고 간 자리는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다.

시집을 오고 나서, 나는 생전 안 하던 청소를 정말 열심히 했다. 처녀 적에는 벗은 옷을 벗은 자리에 그대로 두고 입을 때 다시 발만 넣어 입는가 하면, 잠자고 일어난 자리에서 몸만 빠져나왔다가 잘 때가 되면 다시 쏙 들어가서 잤다. 살림을 도맡아 해 주시며 손녀딸의 방청소까지 일일이 깔끔히 다 해주셨던 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굴러다니는 머리카락과 먼지 뭉텅이 더미에서 살아야 했을 것이다.

그랬던 내가 시집을 와서 아이를 낳고 살다 보니 아이가 뽈뽈 기어 다니고 보이는 것마다 입에 집어넣는 것을 보고 나서는 바닥에 무언가가 있는 것을 그냥 지나치는 것이 힘들어졌다. 밤낮으로 쓸고 닦고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어서 몇 번의 만삭을 보내면서도 단 한 번도 청소를 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엄마가 되었다는 것 하나로 일어난, 실로 엄청난 각성이 아닐 수 없었다.

얼마 전 주민센터에 가서 민원업무를 보는데 지문인식을 할 일이 있었다. 안내에 따라서 지문인식기에 엄지손가락을 댔는데 도무지 찍히지를 않는 것이다. 이렇게도 대보고 저렇게도 대보고 실랑이를 한참 하다가 주민센터 직원이 퍽이나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선생님, 지문이 안 읽히는데요.”




나는 얼른 내 엄지손가락을 들여다봤다. 밝은 곳에서 자세히 들여다본 내 손은 어디서 험한 일이라도 하는 것처럼 메마르고 거칠어져 있었다. 지문은 눈으로 보기에도 희미하게 닳아 있어서 지문인식이 됐다면 오히려 더 이상할 정도였다.


직원의 난감하고 난처한 표정은 그저 업무를 진행하는데 생긴 작은 차질을 대하는 것이었을 텐데 나는 어정쩡하게 선 채로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젊은 여자가 얼마나 험하게 살았으면 벌써 지문이 닳았나 괜히 흉이라도 보는 것만 같았다.


같이 간 남편에게 내 지문이 읽히지를 않는다고 말하며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괜히 신경질이라도 내고 싶은 기분이었다. 당신이 나를 데려다 생고생을 시켜서 지문까지 다 닳아버렸다고 여차하면 되지도 않는 생짜를 내며 발이라도 동동 구를 판이었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어찌어찌 다른 방법으로 업무를 보고 나서는 괜히 인주 묻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주민센터를 나섰다.

섬섬옥수였던 엄마 손을 닮지 않고 뭉툭한 아빠 손을 닮아 투박하고 못생긴 손을 가진 나는 예쁜 손을 가진 사람들이 참 부러웠다. 네일아트도 하고 곱게 가꾼 손이 그들의 예쁜 얼굴보다 더 눈에 띄었다.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때가 분명히 있었을 텐데 결혼식 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해보고는 한 번도 하지 못했다. 어차피 길고 매끈한 손도 아니라서 하나마나한 것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언제부터인가 나도 아이들이 흘린 과자 부스러기를 얼른 손으로 쓸어서 버리거나 모두 잠든 밤에 거실서 혼자 머리를 말리며 주위에 가득 떨어져 흩어진 머리카락들을 손으로 쓸어 모아 버린다. 청소기가 버젓이 있어도 자꾸 그런다. 사악 사악 소리를 내며 바닥을 쓸고 나서는 먼지를 모은 손을 꽉 쥐고 쓰레기통에 탁탁 턴다.

손이 마를 때가 거의 없을 정도로 물 닿을 일이 많으면서 나도 때로 고무장갑을 끼지 않고 설거지를 할 때도 많고 아무렇지 않게 세제를 만지기도 한다. 할 일이 좀 많았다 싶으면 여지없이 손이 심하게 거칠어져 버석버석 소리가 난다. 로션이라도 바르고 좀 쉬어보자 싶으면 아이가 우유를 엎지르거나 화장실에서 응가 다했다는 외침이 들려온다. 애석하게도 내 손은 쉴새가 없다.

할머니의 손은 사시사철 거칠거칠했다. 갈라져서 피가 나기도 했다. 몇 번은 할머니를 자리에 앉히고 크림을 잔뜩 발라 마사지를 해드리기도 했다. 그런데 할머니는 미끌거린다며 이내 손을 박박 닦아버리곤 했다. 그러고 나서는 이내 버석버석 마른 손으로 사악 사악 소리를 내며 바닥을 또 쓸고 다녔다.

할머니에게 왜 그리 하시냐 물었던 적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물었어도, 별 말은 안 하셨을 것이다. 청소기를 쓰면 전기가 아까우셨을 것이고 휴지를 쓰면 휴지가 아까우셨을 것이다. 묻지 않았어도 그 대답은 어렵지 않게 머리에 그려진다.

할머니의 손은 길고 가늘었다. 가지런한 손톱과 손가락을 가진 엄마의 손은 할머니의 손을 닮았을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 손에 매니큐어가 발라져 있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어쩌면 그렇게, 손에 걸리적거리는 것은 뭐라도 싫다며 한사코 맨손으로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했는지 모르겠다. 쩍쩍 갈라져 피가 나는 손가락에 할머니는 그저 반창고만 듬성듬성 바를 뿐이었다. 그 손으로 할머니는 온 집을 먼지 한 톨 없이 반짝반짝하게 만들었다.

며칠 전 저녁식사를 하고 대신 설거지를 하던 남편이 말했다.

"광고모델들 중에 손 모델하는 사람들은 집안 구석구석에 핸드크림을 놓는대."

식탁을 닦고 있던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런 사람들은 살림도 안 할 거야, 아마. 그치?"

남편은 뭔가 잔뜩 뾰로통해지기 직전인 나를 달래듯 웃어 보였다. 그리고 나는 잠깐 멍하니 서있었다. 그리고 평소 같으면 나중에 해버리자며 자칫 잊고 넘어갔었을 텐데 그 자리에서 핸드로션 두 개를 주문했다. 그리고 그날 밤 자기 전에 언제 마지막으로 썼는지 기억 안 나는, 거의 다쓴 핸드로션을 있는 힘껏 짜서 손에 철퍽철퍽 바르고 잠을 잤다.

이튿날, 주문한 핸드로션을 받아 부엌 선반 위 잘 보이는 곳에 하나를 놓고 나머지 하나는 안방의 화장대 위에 놓았다.

나는 아직도 여지없이 손으로 바닥을 쓸어낸다. 손으로 바닥을 쓸 때 나는 사악 사악 소리가 할머니가 그랬던 것 같은 소리다.

그러고 나서는 손을 씻고 물을 대충 옷에 닦고 핸드로션을 쭉 짜서 바른다. 손을 열심히 만지작거리며 고르게 펴 바른다.

그리고 손에서 나는 향긋한 냄새를 맡으며 아주 잠깐 동안만 촉촉하고 매끄러울, 할머니 손을 닮지 않아 못생긴 손을 가만히 들여다보곤 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