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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o Oct 31. 2020

정말 그냥 전화한 거 맞아?

핸드폰을 켜고 전화번호부를 쫘라락 내려본다.


왠지 낯설고 새로운 것은 거의 없는 것 같이 골동품 같은 전화번호부 안의 이름들. 연락 안 하고 지낸 지 몇 년이 흐른 이름들이 절반 이상, 아니 거의 전부 인 것만 같다. 아마 번호가 몇 번은 바뀌고도 남았을 것 같은 이름들도 꽤 보이는데 왜 아직도 내 전화번호부에 있는지 의아하다.
 
분명히 예전에는 이렇게 전화번호부를 쭉 훑어 내리며 누구에게라도 전화를 거는 것이 익숙했다. 그것이 얼마나 오랜만의 전화였는가 하더라도 나는 상대방의 목소리를 듣기를 기대했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즐거웠다.

상대방에게 내가 그만큼 반가운 상대가 아니었더라도 괜찮았다. 통화를 하며 몇 시간을 때우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다 무슨 이야기가 나와도 상관없었다. 그렇게 나는 내 전화번호부 안의 누구와 갑작스러운 통화를 해도 좋았다.


그 시절의 나는 꽤 괜찮은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고 꼭 그렇지 않은 날에도 지금보다는 훨씬 더 가벼웠다. 별생각 없이 지내도 무방한 그런 편안한 인생을 즐기고 있었다. 꼭 그렇지 않아도 뭐 어때, 라며 한없이 경박해도 됐었다.       
 
내 안부를 전하고 상대방의 안부를 듣는 것이 언제부터인가 버겁다고 느껴질 때가 있었다. 상대방과 나의 친밀도가 얼마나 높고 낮은지의 문제가 아닌 내 문제였다. 아이를 낳고 키우고 살아내는 것 사이의 크고 작은 위기를 반복하면서 나는 변했다. 변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기보다 변할 수밖에 없었다. 타고난 성격을 뒤집었다 놓았다 하며 가끔은 스스로가 낯설 정도로 달라진 나에게 놀라기도 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해지고 그 간극이 때로 너무 커서 제어가 안 됐다. 별 것 아닌 것에 서럽게 울고 또 별 것 아닌 것에 배꼽이 빠져라 웃었다. 그런가 하면 울어야 할 상황에 울지 못하고 웃을 만한 상황에도 웃지 못했다.


나 자신이 누구와 마주해도 즐거운 사람이었다는 기억은 희미해졌고 그래서 사람을 마주하는 것이 불편해졌다. 그런 사람이 되어버린 것을 들키는 것이 두려웠다.
 
내게는 힘이 들 때, 털어놓고 싶은 것들이 있을 때 언제고 전화하라는 이도 종종 있다. 그러는 김에 본인의 이야기도 하고 싶어 하는 이도 있다. 어떻든 고마운 일이다. 매번 고만고만한 것들, 하지만 나는 매번 버텨내야 하는 것들을 그렇게 매번 말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거의 매일이 버티기 도전 같은 하루인 나는 갈수록 그것이 쉽지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화번호부를 들여다볼 때가 있다.
 
예전처럼 거의 랜덤에 가까운 통화상대의 설정은 불가능 해진 지 오래이다. 통화를 하고 싶고 해야만 하는 상대는 이제 얼추 정해져 있다시피 한 것이다.
벌써 내가 느끼는 삶의 무게를 얼마든지 짐작하고 나의 전화를 받을 상대, 아무에게나 쏟아낼 수 없는 이야기들을 하는 것이 가능한 상대는 몇 되지 않는다.
 
진즉 내가 몇 번이고 그리 해 본 이에게 전화를 걸고 싶을 때가 있다.
 
벌써 며칠간 망설였던, 하고 싶은 말을 몇 번이나 되뇌던, 그래서 외우다시피 한 번호를 눌러 전화를 건다.
 
항상 반갑게 받아주는 이에게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목소리를 가다듬어 입을 연다. 그리고 별일 없었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이야기들을 이어간다. 그러다 잠시 숨을 고르는 아주 짧은 찰나에, 상대는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던 내게 말한다. 그리고 나는 들켜버린다.
 
“정말 그냥 전화한 거 맞아?”




그냥 전화했다는 거짓말은 이미 들켜버렸지만 나는 아무렴, 그냥 전화한 게 맞다 고 여전히 거짓말을 한다. 아무 일이 없기를, 내가 괜찮기를 바라는 마음뿐인 상대는 조심스레 몇 번을 재차 캐묻지만 나는 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뚝심 있게도 거짓말로 일관해버린다. 털어놓을 만한 무게가 아닌 이야기들을 털어놓아봤자 그 무게가 덜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몇 번이고 겪어보고서는 그런 것은 그냥 내 속에 담아두고 뚜껑을 닫아놓는 것으로 하기로 했다. 그 안에서 어떻게 되든 지금은 새어 나오지 않도록 꽁꽁 가둬놓기로 한 것이다.
 
털어놓는다 한들 달라질 것이 없는 것 같은 것들일랑 잊어버리고 게 중에 말하고 싶었던, 더 가벼운 것들로만 신속하게 골라서 이야기를 이어간다. 채근을 멈추고 나의 그런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는 그런 고마운 이에게 무거운 것은 이제 그만 안겨주고 싶은 실낱 같은 염치가 발동을 한 것이다.
 
그래서, 결코 지나가듯 한 전화가 아니었지만, 정말 그냥 전화했냐고 묻는 말에,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보이지도 않는 얼굴에 미소까지 띄웠다. 그러면 정말 그냥 전화한 것이 될 것만 같아서. 털어놓을 어떤 것도, 없는 것만 같아서.
 
나를 너무도 잘 아는 상대는 내가 어떤 심경으로 전화를 걸었는지, 왜 이렇게 통화를 끝내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내가 털어놓는 이야기들을 언제고 기다려 주겠다는 마음을 비춰 보인다. 그 감사한 마음은 나에게 닿아 그렇게 통화를 끝내려는 즈음에 이상하게도, 하려 했던 말을 하지 못한 채 말을 끝내버리는 아쉬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이와의 통화로 나는 조금은 괜찮아진다. 조금은 괜찮은 삶을 사는, 괜찮은 사람이 된다. 그리고 나는 그걸로도, 얼마든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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