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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o Oct 11. 2020

남의 돈 먹기가 쉬운 줄 아나

대학을 졸업하고 한 달여간 본격적인 구직활동 끝에 첫 직장에 출근할 수 있었다. 면접 결과가 나오기 하루 전날, 엄마는 내 발 밑으로 물이 찰랑찰랑 차오르는 꿈을 꾸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이 길몽이라고 말했다.


취직을 하기까지 길지 않은 시간이 걸렸던 것은 확실히 운이 좋았다. 새벽처럼 일어나서 아침마다 시루 같은 지옥철을 타고 직장인들이 쏟아져 내리는 역에 내려서 커피 한 잔을 사 들고 걷는 것도, 아이들과 함께 집에 갇혀있다시피 하는 지금의 현실에 비하면 꿈에서라도 그리울 만한 것이다.


박봉에 야근 많기로 소문난 업계에 발을 들인 사회초년생은 상상했던 사회생활이 이런 것이 아니라는 생각과 이 시간을 버텨내면 나도 저 멋있고 카리스마가 넘치는 상사처럼 될 수 있을까라는 기대에서 하루도 몇 번을 오락가락했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사수에게 일을 배우며 하루 종일 깨진 어느 날 왠지 억울하고 자존심이 상해서 퇴근을 하고 만난 지금의 남편인 당시 남자 친구에게 안겨 눈물 콧물을 쏟으며 운 적은 있다.
                
아빠는 40여 년 간의 공직생활을 마치시고 퇴직을 하셨다. 아빠는 주말에도 거의 쉬어본 적이 없다. 함께 여행을 간 적도 거의 없다. 졸업식이나 입학식에도 함께 하지 않았다. 엄마도 일을 하셨기 때문에 그런 추억을 만들기에 넘치는 기억을 가져본 적은 없지만 유년을 간직하기에 부족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부모님은 게으르거나 태만한 면모를 단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성실과 근면으로 똘똘 뭉친 분들 이셨다.


흰머리가 지긋하신 지금에라도 세상의 모든 재미를 느긋하게 보시며 시간을 보내시면 좋겠지만 그럴 수도 없는 형편에, 그때 왜 그렇게 열심히만 사셨는지 조금은 원망스럽기도 하다.
 
취직을 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른 출근과 늦은 퇴근으로 피곤에 절어갈 때 즈음의 어느 날 퇴근 하고 옷도 벗지 않은 채로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는데 나보다 더 늦은 퇴근을 하고 들어오신 아빠가 나를 스윽 보시더니 말씀하셨다.
 
“힘드냐.”
“네.”
“남의 돈 먹기가 쉬운 줄 아니.”





 
아빠는 내가 생애 첫 직장에 출근을 하기 전 날, 나를 불러다 앉혀놓고서 내 월급을 물으셨다. 월급을 들으신 아빠는 내가 받는 월급의 세 배를 회사에 벌어다 줄 각오로 일을 하라고 하셨다. 언제나 그랬듯 조선시대 선비 같은 말씀을 하시는구나 했지만 첫 직장에 임하는 마음가짐을 다잡기에는 충분한 설교였다.


비록 출근을 하고 회사에서 보내는 하루하루가 아빠의 가르침처럼 패기 넘치고 보람차지는 못했지만 회사에 폐가 되지는 말자, 대충 뻐기다가 집에 가지는 말자, 회사가 나에게 월급을 줄 때 아까운 마음이 들게 하지는 말자 같은 비교적 모범적인 태도를 흉내내려고 나름의 노력은 했다. 사회에 첫 발을 들였던 나에 대한 평가가 이다지도 후한 편인 것을 보면 그때의 기억이 힘들고 괴로웠던 것뿐 만은 아니었던 것도 같다.
 
아빠의 회사는 내가 다니던 회사와 아주 가까웠다. 학창 시절엔 내가 등교 준비를 하기도 훨씬 전에 아빠가 이미 출근을 하셨기 때문에 아빠 차를 타고 학교에 가본 적이 없다. 한 20분 정도 일찍 움직이면 앉아가기는커녕 팔도 들어 올릴 수 없는 지옥철 대신에 쾌적한 아빠 차를 얻어 타고 출근할 수 있었다. 아빠는 기꺼이 나를 태우고 출근길에 나섰고 나는 40분 정도의 시간을 아빠와 보낼 수 있었다.


가는 길에 아빠는 라디오를 켜곤 하셨고 내가 듣는 당장이라도 춤이라도 출만한 음악들 대신에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들에 귀를 기울였다. Simon & Garfunkel의 Scarborough Fair 같은 노래가 나오면 나는 슬며시 아빠의 옆모습을 봤다. 아빠가 좋아하는 음악이다. 아빠의 입에서는 간혹 멜로디가 새어 나왔고 핸들을 잡은 아빠의 손가락이 경쾌하게 움직였다. 그렇게 나와 아빠가 함께 좋아하는 음악, 아니, 아빠가 좋아하시는 것이 분명했기에 나도 그러기로 마음먹은 음악이 나올 때면 그런 아빠의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고 크게 티를 내지는 않으며 리듬을 즐기는 러닝타임이 꿀같이 달콤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대신에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가는 것이 편했던 나는 천상 무뚝뚝한 큰 딸이었다. 아빠가 혼자 출근하시는 길이 어땠을지는 모르겠지만 길이 뻥뻥 뚫리면 뚫리는 대로, 막히면 막히는 대로 호젓하게 혼자 흥얼거리기도, 라디오에서 나오는 재미난 이야기에 목청껏 웃을 수도 있는 아빠의 출근길 자유를 빼앗는 것이 싫어서였기도 했다.
 
새 직장을 얻게 되고 더 이상은 아빠와 함께 출근할 수 없었다. 그 이후로도 아빠는 안식 휴가를 갖고 퇴직하기 전까지 몇 년간 더 근무를 하셨다. 아빠와 함께 하는 시간은 점점 더 없어지다시피 했고 후련하고도 아쉬운 마음으로 결혼식장에서 내 손을 지금의 남편의 손에 쥐어주셨다.
 
남편은 어린 나이에 사업을 시작했다. 이렇다 할 자본도, 경험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했던 사업에 시행착오는 빈번했고 운영은 만만치 않았다. 곁에서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는 쉽지 않았고 사업이 잘 될 때는 잘 되는대로, 안 될 때는 안 되는대로 고스란히 온몸으로 여파를 받았다.


언젠가 연이은 실패에 남편은 위축되어 있었고 깃털 같은 가능성에 위태로운 희망을 잡고 있었다.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 아닌 일 투성이인 상황에서 나도 모르게 남편을 궁지로 몰 때도 있었고 그렇게 한 결과는 결국 서로 상처를 받게 되는 것이었다.


고군분투하는 남편에게 과연 어떤 것이 힘이 될지 뼈저린 체험을 몇 번이나 해본 후에야 조금씩 알 것만 같았던 어느 날은 남편의 어깨가 유독 쳐져 보였다.
 
“남의 돈 먹기가 쉬운 게 아니다, 그치.”
 
빙긋 웃으며 나는 말했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생활비가 떨어져 간다는 말 대신에. 만약에 나오는 대로 말을 했다면 절대 빙긋 웃지는 못했을 것이다. 얼굴도 함께 죽을 상이 되어가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손으로는 남편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남편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라고 생활비가 떨어져 간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을 것이다.


나는, 내일은 다른 날이 되기를 바라는 그에게 나의 말이 날카로운 일갈과 따뜻한 위로가 되기를 동시에 바랬다.
 
첫 직장에 고작 며칠을 출근해놓고 세상 다 지친 얼굴을 하고 있던, 이제 세상에 첫 발을 내디딘 딸에게 아빠가 이제 시작이니, 지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으셨던 것처럼.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금방이라도 빈정이 상해버리기 쉬워질 만큼이나 아빠의 그 한 마디가 야속했다. 차라리 힘내라, 우리 딸 파이팅이라도 해주시지 저러시나 싶었다.


그러나 아빠의 한결같은 40년의 공직생활이 보이는 것만큼 쉽지 않았던 것처럼 어려움을 이겨나가야 할 각오는 어느 순간에나 필요하다. 고등학교만 졸업한 아빠가 몇십 년간 차곡차곡 이뤄낸 자리를, 고시에 합격한 젊은이가 한순간에 올라와 아빠와 같은 선상에 서 있다는 현실이 아빠에게는 몹시도 씁쓸한 것이었다.


조금 더 학업에 매진하고 열심히 할 것을 언제나 기대하셨지만 나는 결국 그렇게 해내지는 못했다. 공부하고 배워서 이뤄낸 것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던 아빠는 딸이 그렇게 해서 조금은 편한 인생을 살기를 바라셨겠지만 누가 보아도 박봉에, 야근이 많기로 유명한 그런 업종에 발을 들여놓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려는 딸에게. 세상은 이겨내고 버텨내야 할 것 투성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으셨을 것이다.
 
나는 아빠와 함께 하는 그 출근길을 좋아했다. 그러나 얄밉게도, 퇴근길에 아빠 회사 앞으로 가서 맛있는 거 사주세요 하며 애교 있게 매달리는 딸은 못 되었다. 퇴근길에는 남자 친구도 만나야 했고 친구들도 만나야 했고 직장동료들과 치킨에 맥주도 먹어야 했다. 출근시간에는 편하게 앉아서 가고 싶어서 20분 더 일찍 부지런은 떨었지만 퇴근시간에 일부러 아빠를 생각하지는 않았다.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는 딸에게 아빠는 전처럼 이렇다 저렇다 할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 조금 서운할 정도로 말씀을 아끼시는 아빠를 보며 나는 그때 그 출근길을 기억한다. 내 직장에 도착해 아빠에게 인사를 했던 순간을 기억한다. 아빠의 눈에 보였던 딸에 대한 응원과 믿음을 기억한다.


이제 나는 아빠에게 받았던 그 응원과 믿음을, 나를 보살펴 주고 사랑해주는 이에게 보내며 살아가사람이 되어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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