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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o Oct 07. 2020

미친년처럼 살았어

몇 달 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생전에 워낙 정신이 맑고 총명하셨던 분이셨는데 노환으로 시작된 각종 질병으로 해가 갈수록 노쇠해지셨다. 할머니는 지 않은 시간을 그렇게 고통으로 보내시다가 코로나가 기승을 부릴 즈음 면회도 허락되지 않는 요양병원에서 손을 써볼 수도 없이 돌아가셨다.


작년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내 뱃속에는 넷째가 있었다. 몸이 고됐지만 기꺼이 맏손녀로서 삼일장을 지켰다. 남편이 집에서 아이들 셋을 돌봐야 했지만 며칠쯤이야 엄마 손을 아빠 손으로 대신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번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친정엄마로부터 듣고서는 당연히 이번에도 삼일장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 하면서도 세상 밖으로 진즉 나와 바닥을 뽈뽈기는 막내를 비롯한 아이들이 걱정됐다.

그러나 고맙게도, 내가 아침에 가서 밤늦게 집에 돌아올 수고만 감당할 수 있다면 남편은 본인이 아이들을 돌보겠다고 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삼일장을 지낼 수 있었다.

친정식구들이 가득한 장례식장은 어떻게 보면 친정 그 자체의 느낌이 들기도 했다. 외가 식구들도 조문을 왔다. 흰머리가 희끗한 어른들을 마주하며 내일모레 마흔이 되는 나 또한 그분들과 함께,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추억을 더듬었다.


집에서 아이들과 전쟁통을 치를 남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에게는 더 없이 편안한 시간이었다. 오롯이 친정식구들과 슬픔을 나눌 수 있었고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할 수 있었다. 우스갯소리로, 집에 일찍 가지 말고 여기서 쉬었다 가라는 말도 여러 번 들었다.

이상하고도 신기했던 것은, 내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내가 어릴 적부터 나를 봐왔던 어른들은 내 얼굴에서 미처 씻어내지 못한 고단함을 얼른 읽어냈다. 그것은 정말로, 그분들이 나를 긴 시간 동안 진실로 아껴왔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너스레를 떨며 사는 이야기를 함께 나누면서도 쏜살같이 지나버린 지난 시간들이 속절없고 맹랑하기 그지없었다.

삼일장을 지내던 중 상복을 입은 식구들이 피곤과 슬픔에 절어 넋을 놓고 앉아있었다. 저마다 커피와 각종 자양강장제를 앞에 놓고 홀짝이고 있었다. 아침 일찍 남편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장례식장으로 온 나도 상을 치우다 한가해져 쭈그려 앉았다.


조문객을 배웅하고 돌아서는 큰 고모와 눈이 마주쳤다. 고모는 나를 볼 때 으레 짓는 미소를 슬몃 보이며 내 앞에 앉았다. 그녀의 하나밖에 없는 딸이 그녀에게 커피를 내밀었다. 그 아이가 아기였을 때가 아직 눈에 선한데 저렇게 커서 참 든든하게도 엄마의 곁을 지킨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모는 내 아이들과 남편의 안부를 물었고 나는 내가 살고 있는 모양을 먼저라도 툭 털어놓고 싶은 마음과 일부러라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싶은 마음들 사이에서 머뭇거렸다.


내가 어릴 적부터 나를 무척이나 아꼈던 고모가, 아이들을 주렁주렁 낳고 사는 내 얼굴에서 삶의 무게를 알아챌까 두려웠다. 그러나 그녀가 살아온 시간도 결코 녹록지 않았기에 그녀는 금방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내 표정을 읽었다. 나는 그저 울듯 웃을 뿐이었다.

그녀의 곁에 앉은 그녀의 딸은 내 핸드폰에 담긴 예쁜 조카들의 사진을 들여다봤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들고 자신의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우리를 키우면서 어떻게 살았어?"

그러자 고모가, 내가 짓고 있던 표정이 딱 저 표정이지 않을까 싶은 얼굴로 대답했다.

"나? 미친년처럼 살았어.. 미친년처럼.."




고모는 6남매 중 셋째, 맏딸로 태어났다. 시골집에 가보면 고모가 읽었던 책들이나 고모가 썼던 글들이 작은 방에 가득했다. 어릴 적 방학 동안 나는 그 작은 방에 틀어박혀 아빠부터 삼촌들과 고모들이 썼을 낡은 책상과 책꽂이를 뒤졌다. 만화도 장난감도 없는 지루하디 지루한 그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나는 미처 없애지 못한 그들의 젊고 어린 흔적들을 발견하는 것이 꽤나 재미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때가, 열 살도 안된 꼬맹이가 이상이나 윤동주의 시집을 접하게 된 시점이다.

그 꼬맹이도 얼추 느낄 정도로 고모는 꿈이 많았다. 생각도,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재산을 불리는 것에 뜻이 없는 할아버지는 자식들을 뒷바라지해줄 여력이 없으셨기에 아빠를 비롯한 6남매는 대부분 자수성가를 했다. 그 와중에 딸이었던 고모는 시집을 일찍 가는 대신 대학을 갔고 유아교육을 전공했다. 고모는 유치원 선생님이었고 작가였다.


어릴 적 기억에 고모는 손재주가 많았다. 아기자기하고 예쁜 것들을 뚝딱뚝딱 잘 만들어냈다. 고모가 쓴 글에 고운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들을 많이 봤다.


혼기가 훌쩍 지난 고모는 할아버지가 중매하신, 아빠와 동년배의 고모부를 만나 결혼했다. 이후에는 딸과 아들을 낳았는데 딸은 어릴 적부터 심장이 약했다. 태어나자마자 수술을 거듭했다.


여유롭지 못한 살림살이에 자꾸 아픈 딸을 보며 고모가 했을 마음고생을, 그때는 나도 어렸기에 짐작할 수 없었다.


그래도 고모는 꿋꿋이 버텼다. 명절이나 집안 행사 때 보는 고모는 그래도 여전히 괄괄하고 씩씩했다. 내막이야 내가 절대 알 수 없었겠지만 적어도 내 눈에 고모는 그랬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고모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빠와 동년배이셨던 고모부는 참 얌전한 사람이었다. 무뚝뚝했고 조용했다. 내 앞에서 그럴 일이야 있었겠냐마는 큰소리를 낼 줄 모르는 양반이었다.


비보를 들었을 때 왜인지 모르게 가슴이 내려앉는 느낌 비슷한 것이 들었다. 남편을 여읜 여인의 심정이야 알 길이 없던 나이였는데 마음이 이상했다.


몇 번 만나보지도 못한 고모부였는데. 아빠와 같은 해에 태어나셨던 고모부. 아빠와 몇시간이고 앉아 바둑을 두곤 하시던, 말이 없던 고모부.

빈소에서의 고모 얼굴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훗날 티브이에서, 영화에서 본 수많은 미망인들의 얼굴이 그저 겹쳐져 희미할 뿐.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가슴을 치고 우셨다고 했다. 결혼하기 싫다고 한 딸인데, 본인께서 억지로 결혼시켰다고. 명이 이리도 짧은 사람인지 알았으면 절대 결혼시키지 않았을 거라고.

고모는 그렇게, 몇 해를 걸쳐 심장수술을 반복해야 하는 어린 딸 그리고 걸음마 쟁이 아들과 남겨졌다. 지금에서야 생각하건대, 고모는 그런 상황에서 닥치는 대로 살아내야 했을 것이다. 고통과 고난이 양일한 나날들을 버티는 것은 오직 사랑하는 나의 아이들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었을 것이다. 내가 아이를 몇이나 둔 이제야, 가늠이 가능한 장면들이다.

고모의 딸은 그 이후로도 다섯 번 정도 수술을 했다. 다행히 아들은 건강했다. 고모는 분명히 억척스러워지고 억세 져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유쾌했고 감정에 솔직한 편이었다.


그것은 결코 삶에 지친 모습이 아니었다. 고모는, 순탄한 인생은 살 수 없었지만 자신의 슬픔과 기쁨을 표현하고 달랠 길을 책과 그림과 사람에서 찾았고 위로받고 응원받는 방법을 알아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는 자라오면서 가끔 "너는 네 큰고모를 많이 닮았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이 듣기싫었다. 넙적한 얼굴에 다부진 골격. 아빠의 피를 이어받아 고모를 닮은 것이 당연한 것일 텐데도 그랬다. 그런데 언뜻 거울에 비치는 나는 고모의 얼굴을 하고 있다. 고모처럼 말을 하고, 웃고, 울고, 소리 지른다.

돌아가신 고모부를 똑 닮은 딸은 더 이상 아프지 않고 고모를 빼다 박은 아들도 듬직하게 컸다. 키도 훌쩍 커서 고모의 양 옆에 서있다.


남편이 없이 아이를 키우고 살아간다는 것을 상상만 해도 벅찬, 지금의 내 눈에 보이는 나이 든 고모는 이제 조금은 편안해 보인다. 괴로워하는 모습을, 아끼는 큰 조카에게는 단 한 번도 보인적이 없는 늘 씩씩한 고모.

그런 고모가, 본인이 살아온 모양새를 미친년처럼 살았다고 말한다. 나는 남편을 여의지도 않았고 아픈 아이도 없는데 그 말이 가슴에 콱 박혀버렸다. 미치지 않으면 살아내기 힘든 것이 여자의 삶이라고 거창하게 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딱히 부정할 도 없다.


나는 미친년처럼 소리를 지르고 미친년처럼 쌓인 일을 하고 미친년처럼 남편과 싸우며 미친년처럼 아이들을 잡아댄다. 안타깝지만 분명히 실제로 나는 그랬다. 나는 지금 미친년처럼 살고 있다. 그리고 몇십 년이 훌쩍 지났을때 꼭 고모처럼 이제껏 나는 미친년처럼 살았노라고 말 할 것만 같다.

헤까닥 눈을 뒤집고 싶을 만큼 벅찼던 모든 순간을 버텨온 고모와, 적지 않은 시간을 그렇게 살아내야 할 나는 분명히 닮았다. 그래서 고모가 남은 삶을 행복하게 살아내기를 진심으로 바라본다.


미친년처럼 살아온 내가 여기 이렇게 살아남았다고, 이제야 정말로 행복해진 삶을 즐길 자격이 있다고,  역시 머지않은 미래에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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