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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매영 Jul 31. 2020

마스크를 고쳐 쓰며

고립된 세계가 뭉친다면

 코로나는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외출 준비에 마스크를 까먹는 법이 없다. 아이들은 마스크 속에서 웃고 연인들은 마스크를 쓴 채 사랑을 속삭인다. 평범하게 스쳐 지나가던 남녀노소는 더욱 표정을 알 수 없게 됐다.  코로나 이전의 시대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사람들은 벌써 마스크를 쓴 채 일상을 보내는 것에 익숙해진 것 같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다. 나는 인간이 아닌 걸까. 면역력이 바닥을 치는 병 특성상 매일 써야 했던 마스크는 써도 써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등에 길게 붙인 고양이처럼 균형을 잃는 것 같다. 어떤 말도 내 것이 아니게 되는 것 같았다.     



 첫 항암을 끝내고 다음 항암 전까지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 국군병원으로 향했다. 당시에는 아직 군인 신분이어서 집에 갈 수가 없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당시 내가 있던 국군병원의 격리병동은 결핵 병동뿐이었다. 일반병실 속에서 사람들과 부대낀 채 요양할 것인가. 전염병인 결핵에 걸린 환자들과 병실은 공유하지 않지만 병동은 공유할 것인가. 

 면역력은 정상적인 수치였지만 일반병동은 부담스러웠다. 말이 일반병동이지 잡다한 일은 환자가 해야 했다. 생활관의 새로운 버전 같았다. 간호장교나 군의관이 내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해도 주변인의 눈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면 결핵 병동은 어떤가. 결핵은 전염이 쉽게 되는 병인가. 군의관은 내게 선택지를 주었다. 선택지를 주었다는 것은 그렇게 쉽게 전염이 되지 않기 때문 일 것이다. 마스크를 잘 쓰고 손을 잘 씻으면 괜찮을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결핵은 드라마에서 본 것뿐이다. 선홍빛의 피를 토하는 병. 폐가 아픈 병. 시름시름 앓다 쓰러지는 병. 드라마에서 본 결핵은 드라마에서 본 백혈병과 닮아 있었다. 안심되었다. 나는 마르지 않았고 항암을 할 때는 앓는 소리를 냈지만, 항암 후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이들도 그럴 것이다. 텔레비전은 과장하기 마련이니까. 별문제가 아니다. 

 병실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텔레비전을 보는 것밖에 없었다. 밖에서 점호할 때도 모두가 잘 때도 텔레비전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책이라도 읽고 싶어 자대에 전화해 짐을 외진 오는 인원을 통해 보내 달라했지만 들어주지 않았다. 마스크를 쓰고 말해서 알아듣질 못하는 걸까. 마스크를 내리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마스크를 내리는 것 자체가 자살 행위였다. 아직 죽고 싶지 않았다. 깔깔이나 내가 읽으려 들여놓은 책들. 포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포기할 수밖에. 진짜 문제는 병실이 아니었다.

 이제는 안다. 마스크는 나만 쓰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우라고 생각했던 그들도 나를 향해 마음으로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어느 날 카테터를 소독해주던 간호장교를 통해 내가 속한 사단에서 사단 소속 장병들 위문을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단 의무대에서 갑자기 민간 병원으로 후송된 터라 사단 의무대에도 내 짐이 조금 있었다. 위문이니 사단 간호장교도 오지 않을까? 사단 간호장교는 친절했다. 사단 의무대에 있는 짐을 부탁드리면 다음 외진 오는 인원에게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마스크를 썼다. 부대에 전화하는 것을 포기한 후 오랜만에 쓴 마스크, 마스크를 쓰는 것이 흡사 불구덩이로 뛰어들기 전 물을 뿌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입원 후 처음으로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을 향했다.

 도착한 강당에는 군종병이 바삐 움직이고 환자복을 입은 장병들은 피자를 먹고 있었다. 사단 간호장교는 어디에도 없었다. 군종장교만이 설교인지 위로를 하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뭐라 말하고 있었다. 다만 그는 확실히 능변가 같았다. 피자를 먹는 중에도 장병들의 눈은 군종 장교를 향해 있었다. 군종장교는 나를 보더니 조롱인지 농담인지를 던졌다. 첫 항암 때는 미처 머리카락을 자를 생각을 못 했다. 마치 골룸처럼 듬성듬성 있는 머리카락이 재밌어 보였나 보다. 군종장교를 쳐다보던 눈들은 일제히 나를 쳐다봤고 웃었다. 

 군종장교는 아무렇지 않게 내게 피자를 권했다. 그 자리를 피할 생각밖에 없는 내게 말이다. 나는 그들에게 잠시라도 불편함을 주고 싶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경례를 했다. 

“사단 간호 장교님을 뵙고 싶어 내려왔습니다. 피자는 백혈병 환자라 먹지 못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아. 사단 간호 장교님은 오시지 않았고……”

  사람들은 당혹스러워했다. 자신들이 농담이라 여긴 것이 폭력이었다는 것을 몰랐다는 듯이. 별다른 말은 더는 하지 않고 병실로 올라왔다. 위문이 끝났는지 군종장교와 군종병도 얼마 안 가 병실에 올라왔다. 그들은 용서를 구했다. 내가 무엇을 용서할 수 있을까. 무엇이 괜찮은지 모르겠지만 괜찮다고 말했다. 그들은 내 손을 잡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면역력 수치가 정상이라 감염될 일은 없었지만 불쾌했다. 자신들 죄책감을 상쇄시키기 위한 기도에 희생되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장교였고 나는 사병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마스크는 타자의 비말을 방어하는 것도 있지만 자신의 비말을 타인에게 튀기는 것을 막는 것에도 의미가 있다. 마스크를 지나간 내 말들은 분노가 잘 여과되어 있었다. 군종장교의 말에는 연민이 짙었다. 조롱 후에 연민이라니. 마스크는 나뿐만 아니라 그들 모두에게 시급해 보였다. 하지만 쓰고 있는 것은 나뿐. 코로나가 번창한 지금은 마스크를 잘 쓰고 다니겠지.     



 매일 아침 텔레비전에는 환자가 몇 명 늘었고 사망자가 몇이라는 뉴스가 나오고 있다. 어느 나라에선 마스크를 쓰는 일이 자신들을 죽이는 일이라 주장했다고 한다. 타인의 표정을 마주할 수 없다는 것은 공포일 것이다. 길을 걷다가 마주하는 표정 대부분은 마스크를 불편해하는 눈썹뿐이긴 하다. 마스크는 우리를 자체적으로 격리병동에 두는 것과 같다. 혼자 쓰고 있으면 유배지만 모두 함께하면 연대다. 자꾸 마스크를 쓰면 엉거주춤하게 되는 이유는 나는 연대보다 유배를 먼저 알았기 때문이다. 내게 마스크는 외부의 폭력이자 폭력을 막아주는 방패였다. 나 자체는 무능하고 연약했다. 하지만 전염병은 다르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가 타인까지 보호하는 장치로서 마스크 작용한다. 마스크는 불편하다. 마스크를 쓰는 것이 타인을 배척하는 일이 아니라 타인을 사랑하는 일이라 생각하니 조금은 풀린다. 특정한 사람들만 쓰던 마스크가 이제는 모두의 일상이 되었다. 마스크를 고쳐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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