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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매영 Mar 29. 2021

일탈을 꿈꾸던 내게 냉면은 주제를 알라고 했다.

 초등학교 6학년 아침 조회시간. 선생님이 출석부를 부르면 한 명씩 나가 수학여행비를 제출했다. 나는 순서를 기다리며 봉투를 움켜쥔 손에 힘을 푸는데 집중하기 바빴다. 혹시나 잃어버릴까 힘을 너무 준 터라 붉어진 손가락이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선생님이 이름을 호명할 때가 되어서야 봉투를 놓을 수 있었다. 온전한 손으로 봉투를 옮겨 들고 선생님 앞에 섰다. 선생님은 봉투를 받는 척하더니 다시 내게 쥐어주었다. 그러고는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고 낮은 목소리로 말하셨다. 기초생활수급자는 수학여행비를 제출하지 않아도 된다고.     


 자리로 돌아오는 동안 봉투를 더욱 세게 쥐었다. 구겨진 봉투 속에는 더욱 구겨지고 찢긴 낡은 지폐가 있었다. 선생님이 봉투 속 돈을 보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가난은 이상한 부분에서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집에 돌아오니 술냄새가 났다. 그대로 나와버렸다. 충동적으로 수학여행비를 들고 피시방에 갔다.     

 

 엄마에게 수학여행비를 내지 않아도 된다고 결국 말하지 못했다. 나는 학교가 끝나면 매번 피시방에 갔다. 아빠를 피하느라 밖을 배회하지 않아서 좋았다. 배를 곯지 않아서 좋았다. 배가 고프면 피시방 근처에 냉면 전문점에 갔다. 고기 고명이 올라간 냉면을 그곳에서 처음 맛봤다.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다 났다. 밤 10시가 되어서야 집에 몰래 들어갔다. 매번 맞았지만 수학여행도 이보다 즐거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8만 원은 일주일이 되자 바닥을 드러냈다. 수중에 돈이 얼마 없어서야 양심에 찔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냉면은 먹고 싶었다. 남은 돈으로 냉면을 먹으러 갔다. 텔레비전을 보다가 실수로 식초 통에 있는 식초를 전부 냉면에 쏟았다. 사장님에게 말할까 하다가 말았다. 한 입 먹어보니 나쁘지 않았다.    

 

 그 날 밤새 앓았다. 죽을 것 같았다. 너무 아파 앓는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속을 도려내는 것 같았다. 윗배가 부풀었다. 엄마가 정말 뜨거운 수건을 배 위에 올려놔줘야 그나마 견딜만해졌다. 수건이 식으면 바로 아파왔다. 엄마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수시로 수건을 갈아주었다. 나는 벌 받은 것 같았다. 울면서 엄마에게 죄를 고했다. 엄마가 도둑놈을 키웠다라며 나를 버릴까 두려웠지만 어찌할 수 없었다. 죄를 고하지 않으면 영원히 아플 것 같았다.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슬픈 눈으로 수건을 갈아주기만 했을 뿐.     


 당장 집에 응급실 갈 돈이 없었다. 밤이 늦어 돈을 빌릴 곳도 없었다. 아빠는 어딜 갔는지 들어오지도 않고. 엄마는 수화기만 몇 번 들었다가 내렸다.

 해가 뜨고 나서야 병원에 갈 수 있었다. 위가 부었다고 했다. 수액을 맞으니 금방 괜찮아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집에서 도착해서도 엄마는 수학여행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엄마는 말없이 흰 죽만 끓여 주었다. 흰 죽을 주고는 엄마는 등만 보이며 집을 정리했다. 엄마 등에 비치는 슬픔이 흰 죽의 밥알처럼 물을 잔뜩 머금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나도 아무 말 않고 죽을 먹었다. 함부로 일탈을 꿈꾸지 않기로 했다. 아빠가 아직도 집에 들어오지 않은 것이 감사했다. 그 정도만 해도 행복했다. 그 정도만으로 만족하며 사는 게 좋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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