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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매영 Jun 29. 2021

투병의 시작은 마음입니다.

첫 항암 치료를 기다리던 날을 추억하며.

 병동 끝 구석에서 휴대폰을 보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주히 카트를 끌고 다니는 간호사들, 쟁반을 들고 분주히 배선실과 병실을 오가는 보호자들 병동을 비추는 조명은 비현실적으로 환했다. 왜 이렇게 환한 걸까. 환한 빛을 보니 스포트라이트가 떠올랐다. 스포트라이트가 크면 스포트라이트 안에 있다는 것을 모를 수도 있겠지. 이곳에선 모두가 주인공인 것 같았다. 나는 주인공이 되기 싫었다. 빛과 조금이라도 멀어지고 싶어 고개를 숙인 채 뒷걸음질 쳐봤지만 숨을 곳이 없었다.


 지인들에겐 모두 병을 알렸지만 애인에겐 알리지 않고 있었다. 지인들에겐 병을 농담처럼 이야기했다. 전화를 걸면 일단 웃었다. 대화가 가라앉지 않기 위해. 두 팔을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헛웃음이 웃음이 될 때까지 과장되게 웃으며 병을  이야기했다. 애인에게까진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휴대폰 화면을 껐다 켰다를 반복했다. 등 뒤 벽에 막힌 몸처럼 마음도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었다.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을 듣는 동안 드라마나 영화를 떠올렸다. 거기서는 어떻게 연인에게 병을 밝혔더라. 생각이 나지 않았다. 뭔가 생각이 나려던 중에 신호음이 끝났다. 애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어떤 말을 해도 울지 마.


 반가운 마음과 다르게 단호한 말부터 나왔다. 울지 않겠다는 선언이자 애인에게 하는 부탁이었다. 누구라도 울면 이제 겨우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 무너질 것 같았다. 당황해하는  애인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마치 점심 식사 메뉴를 나열하듯 별일 아닌 양, 백혈병을 이야기했다. 애인은 괜찮냐고 물었다. 괜찮다고, 별것 아니라고 대답했다. 애인은 몸조리를  잘하라고  했다. 괜찮을 거라 대답했다. 우리는 울지 않았다.    

 

 통화가 끝났다. 병동을 걸었다. 고단한 몸과 생기 있는 눈으로 걷기 운동하는 환자들과 함께 걸었다. 뒷걸음질 칠 여유는 없었다. 우리는 병보다 앞서기 위해 한 걸음이라도 더 걸어야 했다. 두려움과 설렘을 구별하기란 쉽지 않다. 봄이다. 병동 복도에서는 밖을 볼 수 없지만, 봄비가 내리고 있을 것 같았다. 속을 뒤집고 있는 물방울은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봄비 때문일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두려운 것이 아니라 좋아질 것에 설레고 있다 생각하기로 했다.


 문이 열려 있는 병실들에서 신음과 고함이 흘러나왔다. 지금보다 조금 더 두려울 수는 있겠다. 지금보다 죽음에 조금 더 민감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그것들만 제외하면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따분한 일상일 것이다. 지금보다 조금 더 피곤한 일상일 것이다. 괜찮다. 괜찮을 것이다.  


 병을 이만치 따돌렸으면 되겠다 싶어 병실에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애써 허우적거리지 않아도 가라앉지 않았다. 수면 위에 떠 있는 기분이었다. 다른 생각이 들어오지 못하게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다음에 애인과 통화할 때에는 병이 아니라 데이트 코스를 이야기하기로 다짐하며.





투병의 나날들이 모여있는 브런치 북도 소개합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leukem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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