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에게도 고향은 있다

나주여행기 ( 1 )

by 조매영

책상 한편에 놓아둔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린다. 저장하지 않았지만 낯익은 번호, 아빠다. 전화를 받는 대신 진동음을 껐다. 화면이 부재중 전화로 바뀔 때까지 가만히 바라봤다.


아빠를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 불편하다. 책에서 영화에서 보고 들은 아빠라는 단어를 곱씹을 때마다 아빠는 아빠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다. 아버지가 주는 단어의 무게감 또한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었다. 호칭이 거리감의 표현이라면 어떤 거리감도 느끼고 싶지 않았다. 호명할 땐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저장까진 하고 싶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저장해야 한다면 폭력이 좋겠다. 폭력도 호칭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복도 끝에 서서 전화를 건다. 수신음을 들으며 창틀에 쌓인 먼지를 본다. 해묵은 감정을 언제까지 그렇게 안고 살아갈 거냐는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다. 삭다 못해 먼지처럼 불면 쉽사리 흩어질 거라 했다. 내가 안 불어봤겠는가. 괜히 먼지에 입김을 불어 본다. 날아다니는 먼지. 옷에 묻은 먼지 자국, 털어내도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감정의 잔재들을 털어내겠다고 세탁기에 들어갈 수는 없지 않은가.


휴대폰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린다. 차분한 목소리는 자신과 대등한 상대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소름 돋는 것을 애써 참고 용무를 묻는다. 나주에 가고 싶다고 기차 편을 알아봐 달라고 한다. 기차표를 알아봐달라고 말하고 있지만 숙박시설부터 시작해서 길안내까지 도맡아달라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기차 값은 나보고 내라고 한다. 창밖을 보니 햇빛이 지독하다. 사람뿐만 아니라 건물까지 지쳐있다. 당장은 날이 더우니 힘들고 가을 즈음으로 예약하겠다고 말한다. 아빠는 툴툴거렸지만 이내 포기한다. 화를 낸다고 해서 들어줄 관계가 아니라는 것은 대등한 관계로 인정했다면 모를 수가 없겠지. 예약하고 전화하겠다 말하고 대답은 듣지 않는다. 종료 버튼을 눌렀다.


혼자서 고향도 못 찾아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엄마에게 주민 센터나 평생학습관에서 한글을 무료로 가르치니 한 번 보내보라 했는데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 같다. 말하지 않은 엄마에게 짜증이 났다가 한숨이 나온다. 엄마가 한글학교를 이야기 해봤자 아빠는 고함을 지르며 화만 냈겠지. 말하지 않은 엄마는 현명했고 나는 멍청했다. 폭력에게 가능성을 찾다니.


화병까지는 아니고 마음에 더위를 먹은 것 같다.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내 자리가 아니라 정수기로 향한다. 냉수라도 한 잔 마시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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