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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매영 Feb 04. 2024

흔적을 부르자 내게 와 흉터가 되었다

 사망자의 환자복은 어디로 가는 걸까. 구글링을 해봐도 어떻게 되는 건지 나오지 않는다. 2019년 부산 사하구에서 사망자의 환자복 관리 조례안*을 발의 했다는 글이 눈에 띄어 들어가 보니 소각 처리하도록 독려한다는 문장이 눈에 띈다. 보편적으로 사망자의 환자복은 소독 세탁 후 재사용하게 되는 것 같다.


 갑자기 길을 걷는 일이 두려워진 적이 있다. 걷는 곳곳마다 사람이 죽었던 자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릴 적에 멸치 볶음 속 멸치와 눈을 마주쳤을 때보다 더 당황스럽고 무서웠다. 한 번의 눈 맞춤으로 얼마나 오래 멸치를 먹지 못했던가. 나는 이제 걸어 다닐 수 없게 되는 걸까.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 울음을 그치고 바라본 일상적인 풍경에 접근할 수 없었다. 보이는 곳곳마다 가까이 가면 각기 다른 죽음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자이크일 것 같아졌다. 제자리에서 뛰었다. 조금이라도 땅을 덜 밟고 싶었다. 내가 밟고 있는 땅에서 죽은 사람 중 먼 조상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자꾸 뛰다 보니 어지러워졌다. 내가 뛰는 것이 아니라 조상님을 걷어차며 밀어내고 있는 것 같아졌다. 그냥 드러누워 울었다. 밟고 있는 것보단 괜찮지 않습니까. 조상님. 제가 조금 무거워도 건물만 하겠습니까.     


 다시 아무 생각 없이 걷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뒷 머리에 껌이 묻었다. 자기 조상의 마지막이었을지 모를 자리에 껌을 뱉는 사람도 있는데 어쩔 수 없이 밟고 지나가는 것 가지고 뭐라 하실런가. 시체의 산을 넘고 넘어 나도 시체의 산이 될 텐데.  모두 서로를 밟고 지나갔을 텐데 그것이 삶을 유지한다는 것일 텐데 어쩌겠나. 꺼림칙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죄책감은 조금 덜해졌다.    

 

 마저 환자복을 생각하니 내가 입었던 환자복 중 같은 병명의 환자가 입었던 것은 몇 벌이었을까 궁금해진다. 그걸 생각하니 병원에서 느꼈던 삶에 대한 집착과 애정들도 생각난다. 환자복에 죽음이 묻을 자리가 있을까, 살겠다는 집념이 빈틈없이 코팅되어 있는데. 원념을 남길 정도의 기력이 있다면 살겠다고 한 번 더 발버둥 쳐야 했다. 마냥 죽음이 두렵다고 경험자의 투쟁을 외면할 순 없지. 



*https://url.kr/wa3xkh

*제목은 김춘수 시인의 「꽃」의 시구를 변주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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