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필사를 했다.
한 문장을 쓰면서 몇 번을 지웠는지 모르겠다.
내가 쓰는 이응은 왜 그렇게 삐딱한 걸까.
완벽해지려는 마음을 무시해야 한다는데 쉽지 않네.
완벽해지려는 마음을 무시하는 데에 완벽해지고 싶은 마음.
지겹네.
스무 살에 너는 이십 대 초반에 등단하지 못하면 망한 것이라고 했었지.
우리는 이제 삼십 대 초반을 넘어섰다.
우리는 망했나.
모르겠네. 일단은 살아 있으니 된 것 같다.
무언가 생각을 해야겠다고 멍하니 앉아 있으면
떠오르는 생각들 모두가 죽기 직전의 주마등처럼 느껴진다.
이러다 정작 죽을 때는 주마등도 없는 거 아니야?
혼자 중얼거리다 담요처럼 펼쳐놓은 생각을 차곡차곡 접어
한 곳에 치워두고 휴대폰을 든다.
실밥처럼 묻어 있는 생각을 휴대폰을 보며 틈틈이 걷어내다 보면
공감능력이 떨어지거나 배려가 없는 내가 자주 들어 올려진다.
무례한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내게도 무례하게 말을 건다.
사랑받은 사람이 사랑을 베풀 줄 안다는 말을 좋아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 사실 같다.
내가 애정이라 생각했던 것들은 전부 폭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무례한 나를 휴지통에 집어놓고 다시 휴대폰을 본다.
내게 상관있지만 상관없는 기사들과 재미없는 유머를 찾아본다.
기사가 유머 같고 유머가 기사 같다.
혼자 이십 대 초반을 삼십 대 중반으로 바꿔본다.
나는 망했나.
망함을 이야기하던 친구와는 이제
안부도 주고받지 못하는 사이가 되었다.
어릴 적 백일장에서 엄마에게 하루에 몇 번을 죽느냐고 묻는 시를 쓴 적이 있다.
나도 주마등의 끝을 한 번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