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엔 높은 곳에서 곧 잘 놀았다. 얼마나 잘 놀았냐면 영웅으로 선택받았다며 담벼락에 올라가 슈퍼맨 흉내를 내다 머리가 깨지기도 했다. 피가 줄줄 흘렀지만 영웅은 울 수 없다며 두 손으로 상처를 누른 채 집으로 뛰었다.
엄마가 찬 물로 피로 떡진 머리를 감겨 주었을 때 많이 쓰라렸지만 울지 않았다. 울음은 통증을 피하게 해주지 못한다. 울어도 아빠는 때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며 통증을 견디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이었다. 병원에서 머리에 거즈를 붙여주었을 때 영구 같아서 웃겼지만 웃음도 참았다. 웃음으로 상황을 회피할 수 없다. 웃어도 아빠는 때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있어야 그나마 아무 일 없을 가능성이 생겼다.
된통 당하고도 영웅 놀이를 멈출 수 없었다. 아무도 내게 영웅이 되어주지 않았으므로 나는 내게 영웅이 되어야 했다. 왜 상상 속의 괴물은 모두 아빠의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상상 속의 괴물에게 매일 졌다. 매일 졌으므로 영웅 놀이를 아니 훈련을 더욱 멈출 수 없었다.
지금은 높은 곳은커녕 놀이 기구도 못 탄다. 심장이 벌렁거리다 못해 터질 것 같다. 고소 공포증은 언제 온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아빠가 더 이상 내게 위협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부터다.
난장판인 집에서 도저히 글을 쓸 수 없어 스터디 카페에 갔다. 워드 작업을 할 수 있는 워크룸은 스터디룸 내부에 있었다. 워크룸에 들어가 노트북을 꺼낸 것뿐인데 땀이 났다. 요즘 몸 여기저기 탈이 많았다. 운동을 오래 쉬었더니만 운동 부족이 이렇게 심각하게 왔나 웃음이 났다.
키보드에 손을 올렸을 뿐인데 숨이 턱 막혔다. 피부도 숨을 쉰다는 말을 체감했다. 손과 발의 숨이 막혔다. 손과 발이 괴로운지 자꾸 움츠러들었다. 가슴도 답답해지는 것이 뭔가 심상치 않아 인터넷을 켜 검색해 봤다. 증상을 검색하니 공황장애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죽을 것 같단 생각은 들지 않는데 진짜 공황장애일까 아닐 것 같은데. 아무래도 몸은 나와 생각이 다른 것 같다. 앞 머리가 땀에 젖기 시작했다.
고통스러워 몸을 배배 꼬였지 일어나진 않았다. 네 시간에 오천 원을 결제하고 들어온 것이 아까웠다. 견뎌보기로 했다. 입술을 깨물었다. 몸은 고통스러웠지만 초조하거나 불안한 느낌은 없었다. 그렇다면 견딜 수 있다. 나는 유년부터 고통 견디기를 훈련했던 사람이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글을 쓰려고 왔는데 뭐 하는 짓인가 싶어 진다. 그런데 또 일어나면 자존심이 상할 것 같다. 일어나면 오천 원만큼의 고통도 못 이기는 사람이 되는 것 같달까.
결국 자존심은 지켰지만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다신 견디지 않기로 한다. 그래도 땀을 많이 흘려서일까 바깥공기에 기분은 좋았다. 혹시 몸 안에 공포도 보존 법칙이 적용되는 것일까. 대상을 잃은 공포가 사방에 옮겨 붙은 것 같다. 아빠가 내게 공포스럽긴 공포스러웠나 보다. 고소 공포증만으로도 공포가 충족되지 못한 것을 보면.
다음에 ADHD약을 타러 정신과에 갈 때 이 증상에 대해 이야기해 봐야겠다. 공황 장애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고소공포증은 높은 곳을 피하면 그만이지만 공황 장애는 그럴 수 없으니 말이다. 이걸 치료하면 또 공포는 어디로 달라붙으려나. 피할 수 있는 곳으로 달라붙으면 좋겠다. 없어질 수 없다면 부디 글 쓰는 것에 방해되는 곳에 달라붙지 말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