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아침 일기

퇴근한 투표 사무원은 졸리다

by 조매영

투표 사무원 아르바이트를 하고 이제야 집에 들어왔다. 새벽 다섯 시부터 종일 서 있어서인지 관절이 욱신거린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자고 싶다. 그래도 이를 닦고 자는 것처럼 글은 쓰고 자야겠지.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린다.


기표소 방향에서 노인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혹시나 방금 들어간 노인이 넘어진 걸까 싶어 입구에서 하던 안내를 멈추고 기표소로 향했다.


글자가 너무 작아 안 보인다. 뽑고 싶은 번호 말해줄 테니까 그냥 도장 좀 찍어주면 안 되나. 왜 안된다고 하는데. 왜


가림막을 모자처럼 머리에 얹은 노인이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뭉개진 발음이 멀리 선 비명으로 들렸나 보다. 휘적거리는 손 안에서 유난히 긴 비례투표용지가 펄럭이는 것이 꼭 잉어 깃발 같다. 일본에선 사내아이의 건강함과 출세를 기원하는 의미로 잉어 깃발을 걸어둔다지. 노인은 누구의 건강함과 출세를 위해 저렇게 떼를 쓰는 것일까.


노인은 결국 도장을 찍지 않았다. 그리고는 투표용지를 꼭 쥔 채 돌아가겠다고 했다. 왔던 길을 돌아가려 할 때 투표 관리관이 앞을 막았다. 투표용지는 외부로 유출시킬 수 없다고, 무효표라도 받으셨으면 직접 집어넣으셔야 한다고 했다. 노인은 못하겠다고 떼를 썼다. 투표함 구멍이 보이지 않는다고. 그러니까 대신 투표용지를 넣어달라고.


더 이상 투표 관리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노인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노인은 결국 졌다는 듯이 투표함 앞으로 향했다. 헛손질 몇 번 하더니 예상보다 쉽게 넣었다. 노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설마 헛손질 몇 번이 부끄러워서 넣어달라고 했던 것일까. 이렇게 섬세한 사람이 왜 말도 안 되는 걸로 언성을 높였을까. 그것은 부끄럽지 않았던 걸까. 노인은 출구로 향해 걷는 동안 욕을 멈추지 않았다. 느린 걸음에 욕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욕이 다시 비명처럼 들렸다.


생각은 그대로인데 나이만 먹는 것 같다고 친구들과 한탄했던 것이 생각난다. 늙고 병든 몸에 갇힌 채 비명을 지르고 있는 노인. 아니 노인의 모습을 한 아이와 비례투표용지가 펄럭이던 것이 떠오른다. 무력함만 느끼고 가는 것 같아 슬프다. 펄럭이는 비례투표용지에게 기도했다. 출세는 바라지도 않을게 노인의 건강만이라도 어떻게 안될까.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이 투표소를 많이 왔다. 그들을 생각하니 잠시나마 졸리다고 글을 쓰지 않고 자려고 했던 것이 부끄러워진다. 글 쓰는 것은 그들이 집에서 투표소까지 걸어온 길보다 덜 귀찮고 덜 험하다. 물론 도착해서 글이 개판이 나는 것과 자기 화를 못 이겨 깽판을 치는 것은 다를 게 없지만 말이다. 무효표도 표라고 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글도 글이라고 할 수 있겠지. 투표할 준비를 하나도 하지 않고 와선 무효표라도 투표 한 노인처럼 일단 하다 보면 어떻게든 될 거라 믿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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