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지역 아동을 만나는 일을 하는 친구를 만난 적이 있었다. 나도 지역 축제나 행사 때 놀이터 스태프로 일을 많이 하던 시기였다.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다 요즘 아이들이 부럽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좋은 지역 아동 센터와 사회적 관심이 그 이유였다. 그 친구는 내게 오만하다 그랬다.
짧은 만남으로 얼마나 이해할 수 있다는 거야? 우리는 우리도 이해하지 못하잖아. 네 상처와 그 아이들의 상처를 같은 곳에 두지 마. 네 것은 네 것이고 그 아이들의 것은 그 아이들의 것이야.
당황한 나는 내 과거 이야기를 나열하다 이내 침묵했다. 너무 쉽게 판단하고 정의 내린 것 같아 부끄러웠다. 아이들도 자기애를 위한 방어 수단으로 사용했구나. 불행에 대한 확신도 자신감도 없어 외부의 것들을 끌고 와 내 불행을 꾸몄구나. 위로받기 위해 다른 이의 불행을 폄하했구나. 입을 꿰매고 싶었다.
우리는 말없이 술만 들이켜다 헤어졌다. 망원동에서 산새 마을까지 걸었다. 어른이며 아직도 어린아이인 사람이 걸었다. 비틀거리며 어른이 어린아이에게 어린아이가 어른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걸었다. 정말 아이들을 부러워하지 않았던 것을 깨닫고 바른 자세로 걸었다. 그냥 그냥 아무도 맞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만 진실이었다. 왜 포장하려 했을까 자책하며 걸었다. 내 것도 내 것이 아니어서 울며 걸었다.
왜 아침부터 그날이 떠올랐던 걸까. 매일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면서 마주한다 믿었던 것들에게서 미끄러지는 것을 느낀다. 비교하고 꾸미고 피하는 순간이 온다. 그날 걸으며 오만함을 많이 버렸다 생각했는데 그것도 오만이었다. 저울이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마주하는 순간은 피하는 순간부터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 것도 같다. 시를 배울 때 스승님들이 항상 하던 말이었다. 끝에서 시작하란 말. 끝까지 도달하기 전까지 우리는 우리에게만 얼마나 너그러운가. 내 안에 아직도 마주 할 세계가 많다. 바깥 세계를 방어 수단으로 쓰지 않을 것이라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