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화) 부자의 선물

by 경자호

아빠는 좀처럼 돈을 쓰지 않는다.

사진촬영 사건 이후로도 바람 잘날 없는 인생 속 시간은 계속 흐른다. 부모가 천천히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콩나물처럼 빠르게 자란다. 밤마다 깨서 분유를 물려주는 시간간격이 조금씩 길어진다. 매일 울음으로 소통하던 대화가 조금씩 눈으로 얘기하고 옹알이로 알아듣는다.


아내와는 기억이 다르지만 분명 아빠를 먼저 얘기했다. 기특한 녀석이 아빠를 부른다. 낯가림도 심하지 않아 엄마가 자리를 비울 때면 아빠랑 긴 시간도 거뜬히 보내준다. 아이가 잠을 자다 무서운 꿈이라도 꿨는지, 갑자기 울기 시작하면 바람처럼 달려가 아이를 품에 안고 '엄마가 섬그늘에'라는 노래를 가만히 불러준다. 마음의 안정을 찾길 바라는 마음에 소곤소곤 불러주면 기겁을 하고 더 세차게 자지러진다. 그렇게 노래는 부르지 않기로 한다.


부쩍 커버린 아이를 안아 하늘 위로 높이 들어 눈을 마주친다. 가만히 나를 보고 있는 무표정한 아이의 어제보다 무거운 무게를 온전히 느낀다. 받쳐든 어깨 위로 책임감의 돌이 하나 더 얹힌다. 다른 아빠들과 다르게 유별난 아빠를 만나서 네가 고생이 많다. 안쓰러운 마음을 내비치지만 마음만 그럴 뿐 역시 돈은 움직이지 않는다. 아이에게 필요한 유모차부터 카시트까지 무엇하나 사지 않고 주변에서 알뜰히 받아낸다.


아내는 몇 번이고 아이를 위해 좋은 제품을 사야 한다고 다그치지만 그때마다 되묻는다. 그것이 진정으로 아이를 위한 건지, 아내를 위한 건지, 지금 아이는 자신이 스토케 유모차를 타는지, 브라이텍스 카시트 위에 있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우리의 시선만이, 다른 아이가 타고 있는 값비싼 유모차와 비교하고 있을 뿐이다. 아이를 위한다는 핑계로 우리를 위해 쓰는 것을 경계하자고 말한다. 남들의 시선 때문에 억지로 사용될 자원을 아껴 아이에게 되돌려주자고 말한다. 남의 아이를 보는 비교의 시선을 돌려 우리 아이 모습 그대로를 한 번 더 바라보자고 말한다.


나아가 '물질이 주는 효용의 가치가 얼마나 덧없이 짧은 만족감을 지속하지'에 대해 철학적 고찰을 담아 설명한다. 그동안 사들였던 다양한 물건들을 통해 아내가 느꼈던 효용의 지속시간을 되묻는다. 조용히 귀담아듣고 있던 아내가 다시 험한 말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그렇다. 1절만 해야 된다. 좋은 말도 계속하면 잔소리가 된다. 그렇지만 아내도 알고 있었다. 비좁은 집을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 항상 정리하고 치우며 가치 없는 물건의 '불용성'을 배웠다. 아내도 그저 욕할 뿐, 결코 돈을 움직이진 않는다.


아내는 발이 넓다. 인싸 기질이 다분하여 어느 조직에서든 바로 적응하여 녹아든다. 사람들을 잘 챙기고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좋아하여 이것저것 챙겨준다. 앉은자리에 풀도 나지 않는 남편과는 또 다르다. 아내는 그렇게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직장의 선배 언니들이 자녀를 위해 사용했던 스토케 유모차와 브라이텍스 카시트를 받아온다. 수완이 좋은 아내가 결국 목표를 달성한다. 물론 아주 많이 낡긴 했지만...


아빠의 첫 선물

아이가 찾아온 지 반년이 지나가며 추운 겨울이 끝나고 날씨가 조금씩 풀린다. 4월의 따뜻한 봄날, 아내는 오랜만에 친구들과 약속을 잡고 집을 나섰다. 기분 좋게 아내를 보내고 집에 남은 아이와 둘만의 외출 준비를 서두른다. 집에서 500m가량 떨어진 은행을 목적지로 잡아 길을 나선다.


아무리 가까운 곳에 가더라도 챙길 것이 많다. 기저귀, 물티슈, 손수건, 비닐백, 담요와 보리차까지 꼼꼼히 챙겨 가방에 담는다. 무던한 성격의 아이는 부단히 움직이는 내 모습을 그저 무표정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준비를 마치고 아기띠를 힘껏 올려 멘 채 혹여라도 추울세라 고사리 같은 두 손을 연두부 쥐듯 조심스레 움켜쥔다. 아이에게 첫 선물을 해줄 마음에 설렘을 감출 수 없어 발걸음도 가볍다.


날이 풀렸다곤 하지만 꽃샘추위가 여전히 남아 동장군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 행여나 감기라도 걸릴세라 은행 입구의 차가운 출입문을 서둘러 열어젖히고 따뜻한 은행 안으로 들어간다. 이미 많이 늦었다. 태어나자마자 만들어 주려던 선물, 정신없이 바쁘다는 핑계로 시간을 많이 축냈다.


지금이라도 내가 지어준 아이의 이름으로 된 통장을 첫 선물로 만들어 주기로 한다. 유모차, 카시트 그리고 비싼 옷가지들을 살 돈을 아껴두어 지금 한꺼번에 통장에 담아 선물한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아빠의 선물이다. 아빠가 매일 돌던 챗바퀴를 물려주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아이의 가장 소중한 시간을 돈으로부터 지켜주기로 맹세한다.


'띵동' 우리 부자를 부르는 가장 자본주의적인 소리, "읏차"하는 나지막한 숨소리와 함께 아이를 안고 몸을 일으킨다. 기쁜 표정으로 우리 번호가 써져 있는 창구로 다가가 통장을 개설하러 왔다고 말하며, 미리 알아본 서류들을 함께 내려놓는다. 나긋나긋한 목소리 속에 따뜻한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은행직원이 조용히 서류를 훑어본다.


창구에 서서 통장이 만들어지는 것을 기다리며 아이를 바라본다. 무표정하다. 관심도 없는 것 같다. 잠깐 서운한 마음으로 눈을 마주치고자 노력한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힘겹게 눈을 마주친다. 한번 웃어주는 듯 미소가 지어지다 순식간에 사라진다. 역시 시크하다.


은행직원의 비밀번호를 입력해 달라는 안내를 받고 정신을 차린다. 지시에 맞춰 비밀번호도 누르고 얼마 전에 만들어 둔 아이의 화려한 도장도 내놓는다. 2018년 봄, 아빠의 첫 선물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부자는 기쁜 얼굴로 통장 속 이름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 감격에 젖는다.


인생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통장을 만들면서 은행연계 증권회사 계좌를 같이 열었다. 아이의 명의의 계좌에 돈을 입금하고 납부금액이 없더라도 증여세 신고도 잊지 않는다. 그동안 아끼고 모은 게 아이의 미래에 투자된다고 생각하니 절로 미소가 나온다. 투자수익은 투자금액과 시간에 비례한다.


아직 씨앗이 많지 않은 초보농부는 대신 그만큼 시간이 많다. 적은 씨앗이지만 열심히 파종하여 긴 시간 꾸준히 가꾸어 나가자고 약속한다. 아이와 일생을 함께 할 주식들을 찾아 나선다. 아이가 어릴 때 거래가 많으면 추후에 증여문제로 이어질 수 있어 오랫동안 함께할 안전한 주식들을 신중히 찾는다. 대답 없는 아이를 앉혀놓고 이것저것 이야기해 준다. 조용히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아이를 뒤로 하고 씨앗을 뿌린다.


잠깐 쓰고 나면 쓸모없어지는 물건 대신 세상을 이끌어 갈 회사의 주식을 산다. 이제 회사의 주인이 되어 회사가 미래를 바꾸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씨앗이 시간을 먹으며 천천히 자라는 동안, 아이는 10살이 되고 20살이 되고 결혼도 할 것이다.


그때 이 씨앗이 영글어 열매를 맺으면 아이의 독립을 위한 힘이 될 것이다. 아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집에 돌아온 뒤로 아이는 멍하니 있다가 가끔 한 번씩 웃어준다. 아무 생각 없이 맑게 웃는 웃음을 보며 아이의 미래를 상상한다. 오늘의 선택이 미래에 다른 삶을 사는 결과가 되기를 바란다.


미래를 위한 파종을 마치고 오늘도 할인행사 할 때 사놓은 기저귀를 갈아입히고, 아내가 지인에게 받아온 젖병소독기에서 젖병을 꺼낸다. 맘카페 이벤트 후기를 쓰고 사은품으로 받은 분유를 넣고 잘 흔들어, 뜨거울 까 혹시 몰라 손등에 온도를 재고 나서야 조심스레 아이 입으로 가져다 댄다.


배가 고팠는지, 허겁지겁 분유를 마시고 있는 쪽쪽대는 입술을 보며 또 한 번 기적을 느낀다. 매번 브랜드가 바뀌는 분유와 기저귀에도 강인한 생존력으로 칭얼대지 않고 적응하는 아이가 자랑스럽다. 분유를 다 먹고 부자는 함께 거실에 앉아 오지 않는 아내를 기다린다.


친구처럼 지내는 '부자'

아이의 태명은 대만이었다. 아내와 결혼하고 신혼여행 이후 처음 간 해외여행지가 대만이었다. 해외여행을 여러 가지 이유로 꺼려하는 남편 덕에 기다긴 논쟁 끝에 결정된 장소다. 유럽부터 미주까지 다양한 장소를 이야기하던 아내에게 처음 가자고 한 여행지였다.


대만은 한창 취업준비를 하는 동안 학교에서 방학기간 운영하는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통해 다녀왔다. 중국어 실력을 쌓을 요량으로 2개월 좀 넘는 시간을 보냈다. 취업준비를 하던 와중에 스트레스가 극심하던 시점의 일탈인지라 굉장히 행복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 눈에 담아 두었던 타이베이의 아름다움을 아내와 나누고 싶었다. 물론 예산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담수이, 지우펀, 스펀 등 타이베이와 그 근교의 여행지에서 재밌는 일정을 보내고 저녁에 숙소에서 '금문고량주'를 마셨다. 그게 화근이었다. 그렇게 아이의 태명은 대만이가 되었다.


대만이가 생겼을 때부터 친구처럼 지내고 싶었다. 권위적이지 않고 언제나 편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길 바랐다. 옆에 있어도 불편하지 않은 그런 아빠 말이다. 그런 관계를 만들기 위한 어렸을 적부터의 관계형성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오랜만에 나가 돌아올 생각을 안 하는 아내를 기다리며 부자는 멍하니 거실에 앉아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지금이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오랜 친구에게 얘기하듯 편하게 아이에게 물어본다.


"대만아? 엄마 언제 올까?"


"..."


"많이 늦네..."


"..."


"그래도 오늘 안에 들어오겠지?"

"네가 있으니?"


"..."


"너무 아빠를 편하게 생각하는 거 아냐?"

"한마디도 없어?"


"..."


첫 번째 프로젝트가 멋지게 첫발을 떼었다. 일명 "고요 속의 외침" 그런데 엄마는 진짜 언제 오는 거야?...


부자의 따뜻한 관계형성 와중에, 아내와의 새로운 문제로 갈등이 생기기 시작하는데...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