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훌륭한 스승을 만나야 재능이 꽃필 수 있다. 바둑 인공지능 알파고도 알파고끼리만 바둑을 두었다면 아직 인간을 넘어설 수 없었을 것이다.
알파고는 이세돌과의 대결을 앞두고 인간이 둔 기보를 학습했다. 16만 판의 기보에서 무려 3,000만 개의 수를 학습했다. 하루에 한 판씩 둔다면 400년 넘게 걸릴 엄청난 양이다. 방대한 기보를 학습한 덕분에 알파고끼리 양질의 대결을 펼칠 수 있었고, 결국 인간까지 넘어설 수 있었다. 비록 최신 버전인 알파고 제로는 기보 없이 알파고끼리의 대결만으로 탄생했지만, 이 또한 기보를 통해 바둑에 특화된 인공신경망 학습법을 구축한 덕분이다.
바둑의 세계에 기보가 있다면 인간의 세계엔 책이 있다. 기보 없이는 알파고가 인간을 뛰어넘을 수 없듯, 책 없이는 아이가 미래 인재로 도약할 수 없다.
미래는 아이가 지식을 넘어서 그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기를 원한다. 이를 위해서는 두 단계가 필요하다. 첫째, 지식과 정보를 갖추는 단계다. 둘째, 지식과 정보를 활용하는 역량을 키우는 단계다.
첫째, 지식과 정보를 갖추는 단계다. 지식과 정보의 풍부한 수집도 중요하지만, 정보의 질이 중요하다. 부적합한 정보를 학습할 때의 부작용을 인공지능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다. 2016년 3월 마이크로소프트는 트위터 등의 SNS에서 채팅할 수 있는 인공지능 ‘테이(Tay)’를 선보였다. 하지만 테이는 불과 16시간 만에 최악의 인공지능이라는 오명을 안고 폐기되었다. ‘히틀러는 옳고 유대인은 싫다’와 같은 인종차별적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인종차별을 학습시킨 악의적인 사용자 때문에 짧은 시간에 인종차별주의자로 변신한 것이다.
더 섬뜩한 인공지능이 나타났다. 2018년 6월 MIT 미디어랩은 사이코패스 인공지능 ‘노먼(Norman)’을 선보였다. MIT 미디어랩은 미국의 소셜 뉴스 사이트인 레딧(Reddit)에서 죽음과 같은 어둡고 부정적인 게시물로 노먼을 학습시켰다. 그러자 단순한 잉크 얼룩을 보고도 감전으로 사망한 사람이나 대낮에 기관총으로 사망한 남자로 인식했다. 연구를 진행한 이야드 라반(Iyad Rahwan) 부교수는 말했다. “알고리즘보다 데이터가 중요하다. 인공지능을 훈련하는 데 사용하는 데이터가 인공지능이 세계를 인식하고 행동하는 방식에 반영된다.”
처음부터 정보를 잘 선별하여 습득하는 아이는 없다. 검증된 지식과 양질의 정보를 풍부히 보유해야만 이 능력을 키울 수 있다. 그럼 검증된 지식과 양질의 정보가 풍부한 미디어는 무엇인가?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학습 도구가 다양해졌다. 교과서와 사전 등의 책을 찾아보거나 EBS 강의 등을 TV로 시청하는 과거의 학습에서 벗어나, 구글, 네이버와 같은 검색엔진에서 원하는 정보를 검색할 수 있다. 브리태니커나 두피디아 등 신뢰도 높은 백과사전은 물론이고 위키피디아처럼 일반인이 참여해서 만든 오픈 백과사전도 활용할 수 있다. 유튜브의 동영상과 각종 인터넷 강의 사이트, 언론사 뉴스 등 많은 곳에서 지식과 정보를 습득할 수 있다.
하지만 앞서 인공지능 ‘테이’와 ‘노먼’의 문제처럼, 인터넷 공간은 검증되지 않은 지식과 조작된 정보로 넘쳐난다. 어딜 가나 광고로 범벅되어 있다. 성인인 우리 또한 정신을 차리고 보면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자극적인 기사나 광고를 클릭하는 자신을 보게 될 정도다. 우리나라 공영방송인 EBS나 칸 아카데미 등이 신뢰할만한 소수다. 칸 아카데미는 살만 칸이 조카를 위해 촬영한 수학 동영상이 세계적인 무료 온라인 강의 사이트로 발전한 경우다.
신문이나 방송의 기사는 비교적 신뢰할만한 정보다. 다만 주의할 점은 주요 언론사를 제외한 뉴스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인터넷 기사를 살펴보면 손가락에 꼽히는 신문방송사 외에도 수많은 언론사가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 기사 대부분은 사실에 근거한 기사가 아니라 광고주의 입김이 담긴 광고다. 공신력이 있는 주요 언론사라 해도 언론사나 기자의 성향대로 편향된 기사가 많다.(비판적 사고를 키울 때는 이 편향성이 좋은 학습 도구가 된다) 또한, 기사의 생명은 신속성이기에 충분히 검토할 시간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종종 정정 기사가 올라오지만 발견하기는 힘들다. 비판적 사고가 미숙한 아이에게는 기사보다 더 신뢰할만한 미디어가 필요하다.
아이가 학습하는 데 가장 적합한 미디어는 책이다. 책은 내용의 신뢰성, 짜임새, 확장성이 뛰어나다. 아무리 거대한 언론사라 해도 매일매일 시간을 다퉈 쏟아내는 기사를 충분히 검토할 순 없다. 하지만 책은 저자가 원고를 작성하는 기간 외에도 수개월을 더 검토한다. 한 권의 책에 최소 수천만 원이 투입되기에 더 많은 검토와 검증이 이뤄질 수 있다.
책에도 허점은 있다. 자극적인 제목에만 끌려 책을 사지 말고, 본문을 읽어보자. 온라인 서점의 본문 미리 보기를 활용해도 되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서점을 직접 방문해서 본문을 충분히 읽어보고 구입하는 것이다. 서점에서는 부의 불평등이 줄어든다. 분야별 서가에 가면 마케팅비가 부족한 소형 출판사의 책이라도 대형 출판사의 책과 동등하게 꽂혀서 독자의 공정한 심판을 기다린다. 온라인에서는 베스트셀러가 되거나 광고하지 않으면 독자에게 접근조차 힘들다. 온라인에서는 보이지 않는 흙 속의 진주가 서가 도처에 있다.
또한, 책은 하나의 주제를 향한 정보와 지식이 몇 쪽이 아니라 한 권에 이른다. 단 한 가지 주제에 대해 체계적이고 풍부한 지식과 정보를 아우르며 사고할 수 있기에 사고력이 한층 높아진다. 내용의 출처를 명확히 기록해 독자가 지식을 확장하도록 돕기도 한다.
그렇다고 책으로만 지식과 정보를 습득해야 할까? 당연히 아니다. 고른 영양 섭취가 중요하듯, 미디어를 고루 활용하면 교육의 효과를 높일 수 있다. 수학이나 과학 다큐멘터리는 책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내용을 동영상으로 보여주기에 학습효과가 뛰어나다. 책으로 주로 학습하되, 책 이외의 매체를 보조 학습 도구를 활용하면 효율이 높다. 중요한 것은 책만 고집하지 않고, 책 위주로 다른 매체를 적절히 활용하는 균형이다. 부모의 적절한 지도가 필요하다. 인터넷으로 검색한 정보라면 ‘그 정보를 신뢰할 수 있는지’, ‘어떻게 검증할지’를 같이 고민하는 게 부모의 역할이다.
인터넷 사용 계획서를 작성하면 인터넷을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동영상을 시청한다면 재생시간을 적고, 검색사이트를 이용한다면 검색 제한 시간을 정한 후 컴퓨터를 켜자. 검색을 하다가 즉흥적인 생각이 난다고 그를 따라 무작정 검색하기보다 계획서의 여백에 떠오른 아이디어를 적도록 하자. 계획한 시간이 남거나 꼭 필요한 경우라면 실행하되, 그렇지 않으면 다음 계획 때 실행하도록 하자. 즉흥적인 인터넷 검색은 자제하는 것이다. 주제별 키워드별 제한시간을 정하고 그 시간을 기록하자. 그래야 인터넷의 미로에서 길을 잃지 않는다. 수시로 계획서라는 현실의 종이 위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사용은 무분별한 클릭이 아니라 계획적인 학습이 될 것이다.
* 예를 들어, 온도, 습도, 강수량 등 종합적인 날씨 자료를 데이터라 한다. 온도만을 뽑아내 정리하면 온도에 대한 정보가 된다. 그 정보를 바탕으로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다는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둘째, 지식과 정보를 활용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단계다.
미래의 인재는 지식을 많이 암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핵심적인 지식을 실제로 활용하는 역량이 뛰어난 사람이다. 지식과 정보를 역량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무작정 끌어모으기보다 핵심 지식과 정보에 집중하는 것이 우선이다.
깊이 사고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담백한 자극’과 ‘충분한 시간’이다. 종이 매체인 책과 달리, 전자 매체는 강렬한 시청각적 자극을 내뿜는다. 화려한 그래픽과 생동감 넘치는 사운드가 학습을 시작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깊이 사고해야 할 때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
인간의 두뇌는 자극과 사고에 투입할 수 있는 용량에 한계가 있다. 자동차가 쉴 새 없이 지나가는 교차로 한가운데에서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자동차에 부딪히면 목숨이 위험하기에 깊이 생각할 틈이 없다. 오로지 자동차의 움직임이라는 시각적 자극에 반사적으로 반응한다. 반대로 명상처럼 깊은 생각을 할 때의 장소는 어떤가? 움직임이 없는 벽을 마주 보고 소음을 차단한 조용한 실내에서 한다. 깊은 사고를 위해 시청각적 자극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인간은 일단 목숨부터 부지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에, 눈과 귀에 들어오는 자극이 요란할수록 자극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그만큼 사고는 얕아진다. 책은 깊은 사고에 어울리는 담백한 매체다. 본연의 맛을 음미할 수 있는 담백한 음식이다.
책은 깊은 사고를 위한 충분한 시간도 제공한다. 깊이 사고할 필요가 없을 때는 빨리 넘기고, 깊이 사고할 때는 천천히 곱씹을 수 있다. 전자 매체는 속도를 조절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전자 매체의 화려한 자극이 정지 버튼을 누르기 힘들게 한다. 또한, 화려한 자극으로 깊은 사고를 방해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게 한다(자신이 이해하는지 못 하는지를 파악하는 메타인지는 학습 능력의 매우 중요한 척도다). 하지만 책은 각자의 속도에 맞게 읽을 수도 있고 때로는 멈추어 깊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파악하고 제대로 곱씹어 이해하게 한다. 책은 메타인지를 높일 수 있는 학습 수단이다.
특히 전두엽이 미성숙한 초등학생까지는 전자 매체의 자극에 취약하다. 의식을 통제하는 전두엽의 기능이 발달하지 않아 스스로 자극을 통제하지 못하고 더 자극적인 것만 찾는다. 학습은 뒷전이 된다. 컴퓨터나 스마트폰 등의 전자 매체의 학습효과가 더 뛰어나면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만든 사람부터 자녀에게 적극 권할 것이다. 하지만 세계 최고의 PC 운영체제를 만든 빌 게이츠나 스마트폰을 대중화한 스티브 잡스는 자녀에게 컴퓨터나 스마트폰 사용을 엄격하게 제한했다. 내로라하는 IT 인재가 집결한 미국 실리콘밸리에 자연 친화적인 발도르프 교육을 시행하는 초등학교가 있다. 그 학교에는 컴퓨터가 없다. 아무리 실리콘밸리의 혁신가가 자신의 IT 제품이 삶을 바꿔줄 것이라 해도, 그조차도 소중한 자기 아이는 컴퓨터가 없는 곳에서 키운다. 자녀가 어릴수록 화려한 전자 매체보다는 담백한 책이 필요하다.
흔히 착각한다. 현재 성공한 실리콘밸리의 창업자들은 어린 시절부터 컴퓨터를 끼고 있지 않았냐고. 맞다. 그들은 분명 어릴 적부터 끼고 살았다. 하지만 그들이 끼고 산 컴퓨터는 온갖 허위정보로 넘쳐나는 인터넷으로 연결되지도, 온갖 자극적인 영상을 퍼부어대는 유튜브에도 연결되지 않았다. 외부로 연결되기보다는, 내부에서만 프로그래밍하는 고급 계산기로써 컴퓨터를 끼고 살았다. 하지만 오늘날의 컴퓨터는 다르다. 인터넷을 통해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도 빨려 들어가 온갖 자극적인 정보의 파도에 휩쓸려 정신을 놓게 된다. 사고력을 높여야 하는 미래의 교육이기에 컴퓨터보다는 책이 필요하다.
다음 편 - 16. 아이가 책을 읽을 ‘진짜 시간’이 필요하다
글로는 전하기 힘들었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