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신만의 색을 더할 때 빛이 되는 아이
지난 편 - 22. 자기주도력(2부) : 성공도 실패도 아닌 경유지일 뿐이다
아이가 사회에서 살아가도록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입학시킨다. 입학이라는 관문에 들어서게 한다. 때로는 학원이라는 관문도 들락날락하게도 한다. 하지만 아이의 능력이 자라는 관문은 따로 있다.
바로 아이가 흥미를 보이는 곳이다. 아이가 블록 놀이를 좋아하면 흥미가 다할 때까지 놀게 하자. 방바닥이라는 2차원 평면에서 쌓는 블록만큼이나 볼록 솟아오르는 공간을 목격하고, 또 자신의 손으로 그 공간을 꾸밈으로써 공간을 입체적으로 그릴 수 있는 사고력이 자란다. 입체적 사고력은 수학과 과학의 원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우리 애는 그놈의 자동차만 맨날 가지고 놀아요. 지겹지도 않은 가봐요. 자동차를 가지고 놀 시간에 책 좀 봐야 할 텐데요!’ 하지만 자동차야말로 미래의 인재로 키우는 최고의 교구다. 아이가 자동차에 흥미가 있다면 실컷 가지고 놀게 하자. 캐릭터로 치장한 비싼 자동차를 사주기보다 아이의 흥미와 발달 단계에 따라 무동력 자동차, 태엽 자동차, 모터 자동차, 무선 조종 자동차, 아두이노 자동차의 순서대로 나아갈 수 있다. 아두이노(Arduino)는 회로기판 등의 전자 부품과 바퀴 등의 기계 부품 등을 직접 조립하는 제품을 의미한다.
우선 무동력 자동차에서 시작하면 된다. 단돈 오천 원이면 튼튼한 자동차 장난감을 마련할 수 있다. 아이는 자동차를 가지고 놀며 여러 과학 법칙을 몸소 체득한다. 경사진 곳에서 미끄러져 내려오는 자동차를 보고 중력과 가속도의 법칙을 목격한다. 한 번 밀어주면 죽 앞으로 나아가는 관성의 법칙과 범퍼카처럼 앞차를 부딪치면 가해 차량(?)은 멈추고 피해 차량은 앞으로 튕겨 나가는 작용-반작용의 법칙도 몸으로 습득한다. 뉴턴의 3 법칙이 고스란히 자동차 놀이에 들어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바퀴와 마찰력의 관계 등 여러 과학 법칙을 체득한다. 체득한 경험이 훗날 과학을 이해하는 든든한 거름이 된다.
태엽 자동차에서 운동과 에너지의 전환을 체험하고, 모터 자동차에서 전기가 동력으로 전환되는 걸 목격한다. 또한 무선 조종 자동차에서 정보통신기술을 접한다. 이런 과정을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은가? 바로 산업혁명이다. 2차 산업혁명의 동력은 전기다. 손으로 밀어야 하는 자동차가 모터로 움직인다. 3차 산업혁명에서 조작력이 정보통신기술로 대체된다. 손으로 조작하던 자동차를 무선으로 조종한다. 조그만 자동차 장난감에서 아이는 산업혁명의 역사를 목격하는 것이다. 아두이노 자동차를 만들며 기술과 공학을 더욱 깊게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굳이 아두이노 자동차까지 반드시 가야 할 필요는 없다. 아이가 흥미를 느끼는 선까지만 즐기면, 아이 머릿속에 남겨진 흥미가 훗날 학습을 위한 훌륭한 씨앗이 된다.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미래 교육도 별것 아니군. 무동력, 태엽, 무선 자동차만 사주면 그만이잖아.’ 교육의 본질은 겉으로 드러나는 형태에 있지 않다. 교구를 사주는 걸로 끝나지 않고, 그 교구를 통해 어떤 걸 경험하고 어떤 걸 배울 수 있느냐를 봐야 한다. 형태에 집착하는 부모는 실수를 저지른다. 자동차 장난감끼리 부딪히는 놀이를 하는 아이에게 자동차를 아껴 다루라 한다. 무선 조종 자동차는 고장 나기 쉬우니 뜯어보지 말라 한다. 하지만 아이는 자동차 장난감의 충돌에서 물체의 충돌력과 방향 전환을 목격한다. 무선 조종 자동차를 뜯어볼 때 아이 잠재력의 포장지도 뜯어볼 수 있다. 형태가 아니라 교육을 바라보는 부모는 장난감을 함께 부딪히고 장난감을 함께 뜯어본다. 장난감에는 흠집이 남을 것이다. 하지만 신발의 흙이 묻어야 제 역할을 다하는 디딤돌의 역할은 다 한 것이다.
왜 자기주도력이 중요할까? 자기주도력은 문제 해결력과 창의력을 키운다.
“인지과학자들은 천재나 보통 사람 모두 문제 해결 방식이 동일한 과정을 밟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다시 말해 천재와 보통 사람 사이의 지적 능력 차이는 질보다는 양의 문제라는 것이다.”
뛰어난 업적은 타고난 재능 덕분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빼어난 성과의 비결은 재능도 생각의 질도 아니다. 바로 ‘생각의 양’에 달렸다.
근대 과학을 연 뉴턴은 중력의 법칙을 어떻게 발견했냐는 물음에 답했다. “항상 그 생각만 했으니까.” 또한 이런 말도 남겼다. “내가 어떤 가치 있는 발견을 한다면, 그건 어떤 재능보다 끈질긴 생각 덕분이다.”
뉴턴 이후 새로운 과학의 시대를 연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나는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99번은 틀리고, 100번째가 되어서야 비로소 맞는 답을 얻는다.”
아인슈타인 이후 가장 뛰어난 물리학자인 리처드 파인먼도 이렇게 말했다. “물리는 나의 유일한 취미다. 그것은 나의 일이자 오락이기도 하다. 내 노트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나는 항상 물리에 관한 문제를 생각한다.”
<몰입>의 저자인 서울대학교 재료공학부 황농문 교수 또한 몰입으로 한국과학총연합회에서 최우수논문상을 받았다. 그의 성취는 단지 머리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같은 주제를 오랫동안 붙들고 생각하는 몰입 덕분이었다. 자신의 몰입 경험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평소 습관대로 며칠이고 몇 주일이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연구실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풀어나갔다. 박사 과정 선배들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 다수를, 석사 과정인 내가 거의 모두 해결한 것이다.”
뛰어난 업적을 달성한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 문제를 뛰어난 지능으로 손쉽게 푼 것이 아니라, 몇 년이 걸리든 매달린 덕분이다. 사고의 질 못지않게 양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문제 해결에 필요한 사고의 양에 이를 때까지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가 창의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오랫동안 매달리라고 몰입하라고 하면 잘할 수 있을까? 우리조차도 숙식은 제공할 테니 몇 년 동안 수학 난제 하나 만을 고민하라고 하면 누구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차라리 직장에서 야근을 하겠다고 소리칠 것이다. 수학 난제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려운 수학 문제 하나를 주고 종일 고민하라고 해도 그것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그런 따분한 수학 문제에 매달려야 할 의미도 흥미도 없기 때문이다.
몰입을 위해서는 흥미와 의미가 필요하다. 개인마다 흥미를 느끼고 의미를 가지는 것은 다르기에, 의미와 흥미를 강요할 순 없다. 몰입은 강요한다고 되는 게 절대 아니다. “이 정도면 얼마나 재미있는 문제에 속하는 건 줄 아니?” “이 문제에 얼마나 큰 의미가 담겨 있는 줄 아니?” 아무리 소리쳐도 아이는 꿈쩍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의 사고력이 만개하려면 생각의 양을 축적할 수 있는 몰입이 필요하다. 몰입은 의미와 흥미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제야 비로소 아이는 백미(白眉)가 될 수 있다. 백미가 되어 인공지능 시대에도 견고하게 살아남을 것이다.
인공지능 시대에 생존하기 위해서는 흥미와 의미와 백미라는 3미가 필요하다. 흥미를 느끼고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일 중에서도 백미가 될 수 있는 일을 찾고 키우는 게 부모의 역할이다. 다양하게 경험할 수 있는 기회와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 기다린다면, 아이는 스스로 흥미와 의미를 찾아 백미가 될 것이다.
부모님이 베푼 자율 속에서 자랐지만, 아직 내 아이에겐 자율을 선물하는 게 서툰 아빠임을 고백한다. 아이가 장난감을 다루는 법을 모르거나 서툴면 마음 한쪽에서는 가르쳐 주려는 욕구가 살살 일어난다. 다루는 법을 가르쳐주려고 팔을 뻗으려다가도 멈칫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이는 장난감을 다루는 게 서툴지만, 나는 부모로서의 마음을 다루기가 서툴다. 하지만 간질거림을 참고 바라보면 내가 오히려 배운다.
기차 레일 장난감을 사줬더니 나보다 훨씬 다양하게 기차 레일을 끼워 맞췄다. 내가 조립한 레일은 0형, 8형, 조랑떡 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출발지와 도착지가 같은 궤도에서만 한없이 돌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궤도에 갇히지 않았다. 출발지와 도착지가 같을 필요가 없는 까닭에 1자형, 꼬불꼬불한 형태 등 더 다양한 기찻길을 만든 것이다. 실제로 기차와 전철도 그렇다. 서울 지하철도 2호선 말고 순환선은 없으니까. 내 앞의 존재는 일일이 가르쳐야 할 존재가 아니라, 내가 찾지 못한 답도 볼 수 있는 존재였다.
장난감의 ‘장난’이라는 어원은 ‘작난(作難)’이다. 가볍게 이것저것 해보며 어지럽히는 행동이다. 어지럽히기 위해 존재하는 장난감조차 사용법을 정하고 따르라고 강요하는 건 아닐까? 부모의 생각을 주입하는 대신, 아이가 스스로 답을 찾도록 할 때 부모도 생각하지 못한 더 나은 답을 찾는다.
아이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이다. 하지만 부모가 붙잡아야 할 것은 아이가 아니라, 개입하려는 자신의 마음이다. 부모의 그럴듯한 답을 마음속에서 잡아둘 때, 아이는 자기만의 더 근사한 답을 끄집어낼 것이다.
아이가 인공지능에 복제되지 않길 바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것은 멀리 있지 않다. 바로, 아이 한 사람 한 사람이다. 남들에 맞춰 따라 하지 않고, 저마다의 특성을 파악하고 키워줄 때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될 수 있다. 자신만의 독창적인 지적 산물도 내놓을 것이다. 자기만의 색깔과 향기와 삶을 지키며 살아갈 것이다.
빛의 3 원색과 색의 3 원색이 있다. 빛의 3원 색인 빨강, 파랑, 초록이 어우러지면 흰색의 빛이 되지만, 색의 3원 색인 자홍, 남색, 노랑을 덧칠하면 검정의 암흑이 된다. 빛은 안에서 나오는 것이고 색은 밖에서 칠하는 것이다. 부모가 색을 덧칠할 때 아이는 점차 빛을 잃지만, 본래의 빛을 찾아갈 때 아이는 점차 빛날 것이다.
현명한 부모는 경계한다. 세상을 살아가려면 ‘싫어도 버텨야 해!’ ‘싫어도 잘해야 해!’라고 자신의 색안경을 아이에게 씌우고 있지 않은지. 아이의 빛이 새어 나오도록 격려하진 못할망정, 아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색을 덧칠하고 있지 않는지.
글로는 전하기 힘들었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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