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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Jul 24. 2018

이토록 아름다운 몰입의 순간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책 읽는 소녀> 두 번째 이야기


* 이 글은 위클리 매거진 <한밤의 미술관> 2화  '<책 읽는 소녀> - 방해하고 싶지 않아'의 두 번째 이야기임을 밝힙니다.

 





...이 작품은 단 하루 만에 완성된 것이라고 전해진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그림이 완성되기 전, 소녀의 머리 부분이 수정되었다는 것이다.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책 읽는 소녀Young Girl Reading>, 1776





엑스레이로 그림을 분석해본 결과, 소녀는 원래 관람자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프라고나르(Jean-Honoré Fragonard)는 무엇 때문인지 관객을 바라보는 소녀를 지우고 책에 몰두한 소녀의 옆모습을 그려 넣었다. 


이유가 뭘까?


이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프라고나르가 그린 비슷한 형식의 그림 하나를 더 살펴보자.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러브 레터The Love Letter」, 1770.




프라고나르의 「러브 레터」에는 연인에게 편지와 꽃다발을 받은 한 여인이 등장한다. 「책 읽는 소녀」와 마찬가지로 이 그림의 주요대상 또한 ‘여인과 읽을 것’이다. 



그러나 「러브 레터」 속 여인은 소녀와 달리 테이블 쪽으로 몸을 약간 숙인 채 관객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다(그녀의 강아지도 주인을 따라 우리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상기된 볼과 살짝 올라간 앵두 빛 입술이 어딘지 모르게 야릇해 보이는 그녀는 “드디어 그 사람이 내게 넘어왔어!”라며 자랑이라도 하는 듯하다. 



그녀와 정면으로 눈을 마주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여자의 이야기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그렇게 여자의 이야기에 매몰되는 순간, 그녀의 손에 들린 조그만 편지와 생기 넘치는 꽃다발은 한갓 여자를 돋보이게 하는 장치로 전락하고 만다. 만일 그녀가 우리를 바라보지 않고 꽃다발에 코를 묻은 채 조용히 러브 레터를 읽고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더 많은 이들이 수줍게 전해진 고백의 문장들과 편지를 쥔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함께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프라고나르는 「책 읽는 소녀」 만큼은 다르게 그렸다. 


소녀가 우리를 바라보았다면 이 그림 역시 그저 평범한 초상화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책 또한 노란 드레스를 입은 청순한 소녀를 위한 장식품에 불과했을 테고. 하지만 소녀가 책으로 온전히 몸과 마음을 돌리는 순간, 이 그림은 우리를 전혀 다른 세상으로 이끈다.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누군가를 오래도록,
마음껏 바라볼 때 전해져 오는 충만함.

        



프라고나르의 변심 덕분에 우리는 이 아름다운 그림과 마주할 기회를 얻었다.

지금 자신도 모르게 소녀에게 집중하고 있는 당신, 언젠가 소녀가 고개를 들어 반짝이는 눈으로 당신을 바라볼 때까지 그녀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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