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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롱올립 Dec 12. 2019

눈을 감고 보는 공연

   친구가 구해준 오페라 <세빌리아의 이발사> 공연을 보았다. 예전에 유명한 오페라 곡들을 추려서 갈라쇼 형식으로 구성한 공연을 본 적은 있었지만 지금처럼 한 오페라극을 처음부터 끝까지 줄거리를 따라가며 본 적은 없었다. 일반적으로 오페라는 대중에게 친숙하지 않은 이탈리아어로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가수가 부르는 노랫말의 번역을 무대 양 옆 작은 스크린 화면에 띄워 둔다. 과연 스크립트가 잘 보일까 반신반의 했는데 역시나 낭패다.


조금이라도 구사할 수 있는 언어라면 좋으련만, 내게 이탈리아어는 정말이지 너무나도 생소한 언어라 감히 그 뜻을 추측할 수도 없게 비슷하게 아는 단어도 없다. 이를 어쩌나. 옆을 보니 표를 구해준 친구는 어느새 공연에 집중을 하고 있었고 착한 내 남편은 내가 스크립트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자 공연을 보면서도 조금 안절부절한 듯, 내가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그의 불편함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공연에 집중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대강의 줄거리를 읽었던 터라 전체적인 공연의 흐름은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었다. 나는 이탈리아어의 그 생경한 발음과 음의 높낮이, 빠르기를 가만히 응시했다. 섬세하게 다듬어진 배우들의 표정이나 손끝의 움직임, 강약을 조절하며 극에 긴장을 불어넣는 그들의 걸음걸이, 동선, 의상이나 무대장치같은 것들은 상상으로 채웠다.


무대 아래 오케스트라석에서는 머리만 빼꼼히 보이는 지휘자가 무대 위의 배우와 눈을 맞춰가며 분주히 지휘를 하고 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배우들과 눈을 맞추고 그의 단원들에게 지시를 내린다. 각 악기별로 적절한 타이밍에 들어오라고 신호를 주고, 악보를 보면서 극 전체의 흐름을 확인하고 다시 배우와 대사를 맞춘다. 비록 뒷통수와 어깨 위의 조그만 부분밖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는 전장에 선 장군처럼 위용있고 커 보였다. 격렬한 전투의 한복판에서 맹렬히 적군의 한가운데로 뛰어 들어 싸우는 전사의 결의 같은 것이 느껴진다.


아름답게 분장을 했으나 그들은 최전방에서 늘 목숨을 내걸로 싸우는 중이다. 나는 그 치열한 전투의 생동감과 긴장감에 점점 동화되었다. 맹렬히 살아 움직이는 저 존재들과 하나가 된 듯 나는 그 순간 내가 살아있음을 그 어느때보다 분명하게 자각한다. 이탈리아어를 할 줄 모르고, 악기를 다룰 줄 모르고, 지휘를 할 줄도 모르지만 저들의 삶과 여기 객석에 앉은 나의 삶은 큰 틀에서 비슷할 것이다. 예술을 향유한다는 것은 은밀한 연민의 감정을 합법적으로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일 수도 있겠다.

 이탈리아어는 매끈한 표면위를 굴러가는 크고 작은 구술들이 경쾌하게 내는 소리같았다. 음들의 강약이 확실하게 살아 있었고 입 공간의 제약을 아랑곳 하지 않는 듯 유연하고 경쾌한 소리가 부딪히고 구르면서 대담하게 인물들의 감정을 전달하고 있었다. 격앙되고 과장된 듯한 음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훌륭한 음악이 되고 예술이 되어 무대의 훌륭한 에센스가 되었다. 길버트 엘리자베스가 쓴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라는 책에서 작가가 이탈리아어의 매력을 찬미하는 글을 본 기억이 난다. 그녀는 이탈리아어를 신이 내린 가장 아름다운 발음을 가진 언어라고 극찬했다. 과연 춤추는 듯 굴러 갔다가 화난 듯 토라져 오고 새침하게 다시 돌아 앉아 사랑을 갈구하는 저 언어는 그녀가 말한 것처럼 풍부한 생기와 활력을 담고 있었다.

내가 지금 저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고 스크린에 대사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는 무척이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남들이 웃음을 터뜨릴때나 탄성을 내지를때는 나도 눈치껏 얼른 장단을 맞춰야 한다. 귓속으로 들어오는 모든 음의 낯선 감각에 오감이 반응하는데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다. 머릿속으로는 이 낯선 음들이 주는 자극을 분석하고 몸으로는 그 분석에 걸맞는 감정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려 신경을 곤두세운다. 마찰하는 음, 굴러가는 음, 부딪히다 터지는 음, 입안에서 웅웅 맴도는 음들의 소리가 다양한 빠르기와 강약으로 변형되어 약동한다.


감정을 추측하여 주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은 무모하고 겁이 난다. 확신할 수 없는 것에 대해 판단을 내리고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짓고 다시 또 새로운 자극을 받아들여야 한다. 낯선 곳에 여행을 갔는데 주머니 속에 번역기도 사전도 없고 주변에서 쏟아지는 말들은 도통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을때의 상황과 같다. 막막하고 두렵고 순간순간 짜증이 나면서도 묘하게 흥분이 된다.

이 불편하고 어색한 상항속에서도 즐거움은 있다.

나는 앞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귀로 들리는 것을 마음가는대로 상상한다. 저들의 몸짓, 손짓은    없지만   귀는 생생하게 요동치는 음들을 감상하느라 정신이 없다.  상상은 틀이 없고 정해진 내용도 없기 때문에 어디든 흘러갈  있고 무엇이든 만들어   있다. 내가 각본을 짜고 연출도 하고 배우가 되어 연기도 하고 관객이 되어 환호도 한다.  인생은 반쯤 정신줄을 놓으면 재밌는 것들많아지니까 한번쯤 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아고라 크리스토프의 <문맹>이란 책을 떠올렸다. 모국어를 강제로 쓸수 없게 되고 낯선 2언어를 새로이 학습하고  언어로 말하고 쓰는 삶의 단상을 서술한 자전적 소설이다. ‘  없다, 말할  없다 것은 고통스럽고 슬픈 일이다. 가장 익숙하고 편안하게 꺼내어   있는 나의 친숙한 언어를 사용할  없을  인간은 무력해진다. 그러나 주인공은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고 배워가는 가정을 통해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한다. 힘에 굴복하고 무릎꿇을  밖에 없었던  모습은  이상 찾아볼  없다. 그는 문맹의 고통스러운 성장통을 장렬하게 통과했고 마침내 자유로워졌으며 아무도 침범할  없는 견고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게 되었다.


나의 '문맹' 결국 자유를 얻게 될까?  '보지 못하는 ' 확장되고  확장되어 마침내 자유을 얻게 될까? 무대위에 흐르는  선율처럼 나도 언젠가  자유로워지고 싶은데 드라마의 결말을 미리 알려 달라고   없으니 참기로 한다. 예측할  없는 운명은 걱정스럽지만 기대도 된다. 나는 지금 희극과 비극 사이 어디쯤에서 삶의 절정을 향해 조용히 치닫고 있을 것이다. 엔딩이 해피일지 새드일지는   없지만 결말은 반드시 있을테니 어찌되었든 안심이다. 내 인생도 저 무대처럼 이미 막이 올랐으니 지금은 그저 즐길 수 밖에. 이건 연습이 아니라 실전이다. 딱 한번의 기회밖에 주어지지 않는 일생 일대의 순간이다. 그럼 무얼 해야하는가. 다시 집중, 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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