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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부두애 Mar 16. 2021

여보! 나도 개호구 다됐나 봐!

콩깍지 씐다는게 이런 느낌인가?

주말 아침, 늦잠을 자고 무거운 몸을 끌고 나오니 방구가 펜스 앞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다. 녀석... 보호자가 안 보이면 불안해 '왈!!!'하고 짖던 녀석이 웬일로 오늘은 얌전히 있었다.

펜스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방구

19살 할배 노견은 꼬리조차 힘 없이 팔랑팔랑 흔들고 있었다. 그래도 꼬리라도 흔들 수 있으니 다행인 건가? 그런 방구에게 "귀여어!!!"하고 양 볼을 잡고 부비적거리니 다리에 힘이 풀린 방구가 털썩 주저앉는다. 그런 모습조차 귀여운 나는 방구를 번쩍 들어 안고 행복한 미소를 지어본다.


요새 방구를 그냥 보고만 있어도 귀엽다는 마음이 샘솟는다. 처음 느껴보는 희한한 감정이다. 푸석한 털에 앙상한 뼈, 심지어는 제대로 서있지 못해 다리를 바들바들 떠는 방구가 뭐가 이리 귀여운지 모르겠다.


비교의 대상이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부모가 제 자식만 보면 그냥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너무 사랑스럽다는데... 그 마음과 비슷하려나? 아기 아빠들이 사진을 연신 보여주며 자랑할 때마다 어떤 반응보여야 할지 늘 고심하곤 했는데, 이렇게 돌이켜보니 굳이 특별한 리액션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예쁘다"의 비스무리한 말들을 반복하지 않아도 아빠 눈에는 아기의 모든 모습이 다 사랑스러웠을 테니 말이다.


내게 방구가 그런 존재로 다가왔다. 그냥 멍하니 서있고, 누워있다가 고개를 번쩍 들기만 해도, 걸어가다 다리에 힘이 풀려 자빠져도, 그냥 자는 모습도 다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이기 시작했다.


'어라 내가 이렇게 이 아이들을 좋아했었나?'

같은 생각을 여러 번 하던 나는 아내에게 이런 말을 던졌다.

"와 진짜 콩깍지가 씌었다는 게 이런 느낌인가? 나 왜 얘가 왜 이렇게 귀엽지? 나 개호구 다됐나 봐!! 여보!!"

아내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어 너 거의 개호구 다 돼가고 있지!! 크큭~~!!"


몇 개월 전 푸돌이를 데리고 형님(아내의 오빠분) 내외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한 적이 있는데,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배변 패드를 채 깔기도 전에 푸돌이가 실례를 했다. 낯선 곳이었고 쉬가 급했던 푸돌이의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이에 아내와 나는 황급히 식탁에서 일어나 후다닥 녀석의 흔적을 이리저리 닦았다. 형님 부부는 나와 아내를 말리며 본인들이 처리할 테니 놔두라고 얘기했지만 우리는 끝까지 나서서 뒤처리를 말끔하게 정리했다.  

실수해도 괜찮아 푸돌아~

그 모습을 본 형님은 "무슨 너네 얘가 실수해서 당황한 부모 같다"며 웃었다.


사실 푸돌이는 형님과 함께 한 세월이 십여 년이다. 푸돌이가 손을 탔으면 형님 손을 훨씬 많이 탔지, 내 손을 탄 건 얼마 되지도 않는다. 그래 봤자 1년 남짓? 그런 내가 형님 앞에서 푸돌이의 보호자인 척하는 모습이 다소 재밌기도, 한편으론 신기하기도 했다.


사실 진짜 그랬다. 최근에 같이한 보호자가 우리 부부여서 그런 건지... 푸돌이가 쉬를 하자 우리 애가 실수한 마냥 뭔가 죄송하고 민망했다. 그 모습에 형님 내외와 우리 부부는 다 같이 웃었다.


"방구야!! 노숙하니!! 왜 거기서 누워있니?"

애들이 잘 있나 반려견 CCTV로 방구와 푸돌이를 확인한 아내는 사진과 함께 카톡을 보내왔다.

노숙하고 있는 방구 ㅎㅎ 귀엽다

방구가 편안하고 따뜻한 제 자리를 놔두고 이상한 곳에 자빠져서 자고 있다. 안정제를 복용하고도 자지 않겠다고 애쓰던 방구가 자기도 모르게 잠들었나 보다. ㅎㅎㅎ 귀여운 녀석...


그러곤 얼마 안 있어 방구가 일어났다.

"입 돌아갈까 봐 인나셨네!!"

아내가 위트 있는 말투로 방구가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녀석... 귀엽다... 이런 해프닝조차 귀엽게만 느껴지다니...콩깍지가 제대로 씌었다.

처음 이 녀석들과 동거를 시작했을 때, 언젠가는 반려견을 사랑하는 아내의 감정이 나에게 전이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될 줄 전혀 몰랐다. 물론 아내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긴 하지만 말이다.


두 녀석들도 내 마음을 눈치챈 건지 아내가 없을 적이면 꿩 대신 닭이라고 종종 나를 찾곤 한다. 주 보호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서브 보호자 정도는 쳐준 걸까? 그래도 이 느낌 나쁘지 않다. 하하...


뭐 언젠가는 내 마음이, 내 사랑이 더 성숙하고 깊어지면 그땐 이 아이들도 나를 더 깊이 좋아하겠지. 그렇지 않을까? 부디 그 날이 빨리 오길 바라본다.


푸돌아, 방구야. 형이 너네 되게 많이 좋아한다! 우리 오래오래 행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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