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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등어 Nov 24. 2016

델프트에서 만난 '비행'

급 쓰게 된 교환 잡담

  쓰고 나니 매우 덕력이 넘치는 글이다. 덕질 알레르기 주의.




  얼떨결에 중간고사를 못 보게되는 바람에 쿼터 1이 흩어지듯 끝나버렸는데, 한 학기 동안 무얼 배웠는 지 정리해볼 겸, 중간 점검할 겸 글을 끄적여본다.


  네덜란드 교환을 결심했던 요인은 여러가지가 있으나 그 중 하나가 델프트 공대에서 가르치는 과목들이었다. 유럽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공대인 데다가 항공 분야로는 1,2위를 다툰다고 하니 우리학교 과사무실에서도 델프트 공대랑 교환학생 루트가 열린 것에 대해 홍보하던 참.

  미시간대, 베를린 공대, 델프트 공대, 싱가폴대 넷을 후보군에 올려놓고 따져보는데, 맙소사 미시간대랑 베를린 공대는 aerospace가 없다. 물론 기계공학 세부 전공으로 항공을 다루고 있었고 그 외 분야의 과목들 역시 양질의 흥미로운 렉쳐들이었지만 항공을 따로 떼어놓고 독립적으로 연구하는 대학을 가보고 싶다는 생각에 두 대학은 잠시 접어두게 되었다. 여튼 꽤 빠른 속도로 두 대학을 걸러낸 뒤 싱가폴대학이랑 비교해봤는데 유럽쪽에서 여행, 음악, 건물, 비행기등 덕질할 것들이 더 많아 델프트 공대를 1지망으로 썼고 운좋게 붙어서 교환을 오게 되었다.

(장기 계획 없이 막 살다보니 강제 5년 졸업에도 붙은 꼴이 되었지만..)


p.s. 델프트공대는 건축으로도 강하다. 건축도 좋아하니까 뭐, 갈 수 밖에.


  델프트 공대의 강세도 유인 요인이었지만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가르치는 과목들이었다. 전통적인 4대 역학에서 시작한 기계기계한 과목들 뿐만 아니라 항공을 시스템적으로 접근하는 과목들이 많달까. 풀어서 말하자면 기계기계한 항공과는 '비행기' 그 자체에 집중한다. 더 가볍고 효율적이고 튼튼하고 빠른 '비행기'를 만드는 데에 목적이 있다. 하지만 내가 항공과에 다니면서 느꼈던 것은 난 '비행기' 그 자체보단(물론 기본적으론 비행기를 좋아하니까 항공과를 왔다) 비행한다는 것의 컨셉, 그 것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 사람과 항공기의 상호작용에 더 관심이 있다는 것. 여러 요소들의 상호작용을 '시스템'이라 한다면 난 비행기 덕후라기 보단 차라리 비행 관련 시스템 덕후다.

  비행기 사고가 났으면 어떻게 어떤 부분에서 오류가 있었고 실수가 있었는지 알며 흥미를 느꼈고, 비행기를 타는 동생이 매번 딜레이됐다는 말을 하면 공항과 항로가 비행기를 어떻게 관리하는 지 궁금하고, 그래서 진짜 비행기는 어떻게 조종하는지, 거기서 창 밖을 보면 어떨지 등등이 궁금했다. 

  한 마디로 '초음속 전투기' 등의 단어가 매력을 느끼지 못했고 그보단 '경관이 아름다운 항로를 찾는 법'이 더 매력적이었달까.



Avionics 노트와 뮌헨에서 산 월페이퍼


델프트 공과대에서 여는 과목들 중 가장 눈에 띄던 과목들은..


'Avionics and Operation' - 계기항법장치

'Airport Planning and Design' - 공항 계획 및 설계

'Aerospace Human-Machine System' - 항공 인지공학 및 휴먼인터페이스

'Safety Risk analysis' - 안전 위협 요소 평가

'Air Traffic management' - 항공기 관제


  제어공학, 유체역학, 전자공학 이런 것들이 아니다.

  굉장히 실질적인 과목들이라는 점이 꽤 흥미로웠는데 계기항법이나 관제는 실제 항공기들을 운용하는 것들을 가르친다. 공항도 궁금한 것들이 많았는데 전통적인 항공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아 관련 강의가 없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델프트에서는 건축학과와 조인트하는 minor 과목으로 개설되어 있다.


  가장 열광했던 과목은 Human-Machine system하고 safety risk analysis였다. 둘 다 시스템이라는 느낌이 확 온다. human-machine은 안전과도 직결되는 중요한 분야인데 사고에 관심이 많던 나로써는 팬일 수밖에 없다. 거기에 공대스럽다기 보다는 뇌과학이나 인지과학을 바탕으로 심리나 인문사회적인 요인들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하게 된다. 이번 쿼터에 듣게 될 예정인데 매우 기대중이다. 

  Safety risk 과목의 풀네임은 Agent based safety risk analysis인데 agent based-가 붙은 것을 보면 여러가지 요소들을 고려해서 항공기라는 시스템을 바라본다는 것이 너무 재밌게 다가왔다. 실제로 과목설명을 읽어보면 비행기 뿐 아니라 조종사, 승객, 지상관리, 관제, 날씨 등을 고려해서 안전을 평가하는 수업이라고 되어있다. 실제로 하나의 시나리오를 가정 혹은 예시를 가져와서 어떤 것들이 위협이 될 지 추론해보고 사고 케이스를 보고 어떤 지점에 변화를 주면 사고를 방지할 수 있었을 지 고민해보는데, 수식을 '공부'하지 않고 넓게 다양성을 염두해보고 '고민'한다는 것이.. 완전 신난다!!


  쿼터 1 에는 한국 가서 들어야할 과목을 미리 듣는다는 생각으로 'automatic control(자동제어)' 과목 하나와 'avionics'를 들었다. 제어는 보통의 공부하는 느낌이었으나 막상 배우고 보니 공대생으로서는 꽤 유익했다. 여튼, 중요한 건 avionics였는데 요놈은 덕질과 겸해지니 꽤 재밌었다. 유투브에서 조종실 영상을 보면서 이해하는 것도 많아지고 인류가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한 과목이라 마음에 들었다.

참고-> https://brunch.co.kr/@fly-fish/1 "나침반 이야기"


  뮌헨 여행하고 조종실 월페이퍼를 하나 샀었다. Avionics 과목만 제대로 파도 월페이퍼에 보이는 모든 화면과 숫자들의 의미를 적을 수 있겠다 싶어서 월페이퍼 위에 포스트잇을 붙이고 일종의 성취감을 느끼길 기대하면서 질렀었다. 아직은 한 장도 붙어있지 않지만 손이 괜찮아지면 바로 시작해볼 생각이다.




이제 다가오는 쿼터2에서는 가장 관심을 가졌던 두 시스템 과목을 듣게 된다. 

항공을 중심에 두고 사람, 사회, 그리고 환경을 바라보면 어떤 느낌일지.


지금까지 만난 비행이 "빠르고 날렵한 '비행기'"였다면 지금 만나고 있는 비행은 "하늘을 나는 '방법'"이다.


16.11.20. TU Delft library
공부하러 왔는데 하필 앞에 노트북이 있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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