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분 글쓰기 시작한 지 5일 째인데, 이 정도면 일단 쓰지 뭐, 뭐에 대해서라도 쓰면 되지 하는 마음이 생겨야 하는 거 아닌가? 어제는 늦게 잠들었다. 내일 눈뜨면 또 글 써야 하는데 뭘 쓰지 하다가 온갖 글감들이 머릿속을 돌아다니며 이리저리 단어들이 모였다가 흩어졌다가, 문장이 되었다가 '아니야, 그런 글 말고' 하면 싹 지워졌다가를 반복하며 나의 뇌를 깨워버렸다.
다 잊어버리고 자고, 내일 눈 뜨자마자 아니면 잠이 깨자마자 드는 생각에 대해 쓰자고 다짐하며 다시 잠을 청했지만 달아난 잠은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았고 언제 왔는지 모르게 어쨌든 잠을 자긴 잤다. 선선한 아침, 평소보다 30분 늦게 일어났고, 침대에서 더 꾸물럭거렸다. 둘째가 어제부터 수영을 배워서 그런지 꿈에서도 수영하나 보다. 팔다리를 내 몸에 턱턱 올려대도 누워있었다. 눈은 꼭 감은 채로. 뭐 쓰지.
이은경 작가가 하지 말라는 건 다 했다. 화장실 가서 세수도 했고, 옷도 갈아입었고, 화장도 했다. 화장이라 해봐야 로션 바르고 선크림 바르고 하루 종일 뽀송뽀송하게 보이게 해 준다는 이브 생로랑 올 데이 파운데이션인지를 바르고 아이라이너를 하면 끝이다. 하루 종일 뽀송하다더니 나는 안 그렇던데. 화장을 잘하는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마법인가 보다. 아니면 하루 종일 바르고 또 바르라는 건가.
안방에서 나와서 바로 컴퓨터로 가기에 또 장애물이 있다. 부엌. 잠도 안 깨는 데다가 글이 쓰기 싫다. 기분을 좋게 해 줘야 써지지 않을까? 여섯 살 많은 언니가 그만 마시라고 하던 노랑 봉지 커피 말고 그 후로 나온 주황, 하늘색 봉지 커피를 탔다. 그거나 그거나 똑같다고 그것도 끊으라고 할 테니 마셨다고 말 안 할 거다. 이 글을 읽으면 전화 올 텐데, 봉지 커피 이야기를 지울까? 내가 글 썼다고 링크를 보내지 않는 이상 찾아보기까지 하는 건 아니니까 그냥 두자. 나중에 언니 이야기 시리즈가 하나 나올 것 같다.
커피를 들고 글 쓰러 향하는데, 거실 옆 피아노 앞에 앉아서 일하던 남편은 나를 보고 깜짝 놀란다. "어? 오늘 왜지? 얼굴이 더 밝고 하얗고 예뻐 보이네?" 애교고 유머고 없는 나는 단박에 대답했다. "잠 못 자서 얼굴이 허옇게 뜬 건데?" 좀 상냥하게 "그래? 고마워!"라든지, "예쁜데 더 예뻐졌네!" 할 걸 후회된다. 잠이 덜 깨서 여섯 살 많은 언니에게 지지 않으려는 태세로 말해버렸나 보다. 남편도 나보다 여섯 살 많으니 언니로 착각할 만하다. 점점 아무 말 대잔치가 되는 것 같다.
한 문단 쓰고 있었는데, 그것도 무슨 말 쓰냐고 별 내용 없이 쓰고 있는데 둘째가 일어나서 와서 얼굴을 내 어깨에 비빈다. 어젯밤에 내일 입고 갈 옷이라며 미리 챙겨서 꺼내두는 모습에 깜짝 놀랐었는데 옷을 이미 다 입고 나에게 왔다. 둘째로 말할 것 같으면, 달팽이 기어가는 속도로 세상 여유롭고, 시계를 아무리 알려줘도 보고 싶지가 않은지 여전히 잘 모른다. 매일 지각할까 봐 내가 안달이었다.
"여기 시계를 봐봐! 작은 바늘이 어디에 있지? 8 맞아. 긴 바늘이 여기 무당벌레 붙어있는 4에 가면 학교로 출발해야 해. 엄마가 가자고 말 안 할 거야. 네가 시계를 보고, 긴 바늘 8, 작은 바늘 4가 되면 집을 나서는 거야. 엄마는 너를 따라갈게."
삼일 전에 이렇게 이야기한 뒤로 아이는 갑자기 준비를 빨리하기 시작했고, 밥 먹고 피아노 칠 시간도 만들었으며, 집을 나설 땐 "와! 내가 시간 맞게 했다! 8시 20분이야. 엄마 가자!" 한다. 스스로도 굉장히 뿌듯한지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고맙고, 대견하다. 전략을 짠 나도 대견하다고 칭찬 한 번 해주자.
시간 상으론 30분이 지났는데 아이들하고 이야기하느라 분량은 적은 것 같다. 30분 늦게 일어난 것, 아이들 일어날 시간에 시작한 것이 문제였다. 그래도 쓰기 시작한 게 어디야? 썼으면 됐지! 이 문장을 쓰면서 방금 어떤 문장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는데 못 잡았다. 뭐였지. 이어가면 되겠다고 하면서 떠올랐는데 정말 번개처럼 사라졌다. 아쉽다. 이우성 시인이 시의 신이 오지 않는다고 했었는데 나는 문장의 신이 왔다 갔다 하나보다. 이우성 시인에게 시의 신이란 내가 보기에 어나더 레벨의 표현과 상상력을 주는 존재이겠지만 나에게 문장의 신이란 말 그대로 문장을 하나씩 꺼내주고, 내가 받아 적을 수 있게 해주는 능력자라고 하고 싶다. 나는 그러니까 문장의 신이 불러주는 것들을 열심히 받아쓰기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받아쓰기 점수는 몇 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