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감정

어리석음이 글로 된다는 것

by 날아라빌리

지난 주말에 어떤 문장 하나를 붙잡고 혼자 부엌에서 울음을 터트렸었다.

이웃 작가님(눈 비 그리고 바람)의 글을 읽다가 '부사 하나 비집고 들어갈 틈조차 허락지 않은 AI 같은 글 보다 순간의 감정에 전염된 듯한 인간의 어리석음도 글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싶었다'는 문장이 울컥! 내게 와닿은 것이다. 평소라면 어떻게 이런 문장을 쓸 수 있는 걸까, 라며 질투가 섞인 감탄을 늘어놓았을 텐데 그날은 그저 눈물이 쏟아졌다.


며칠 전 '최근 내가 쓰는 글들은 내가 얼마나 솔직해질 수 있을 지에 대한 글이다'는 말을 했던 것처럼 요즘 거의 매일같이 무언가를 토해내고 있었다. 나의 어리석음과 그로 인한 소란과 후회가 뒤섞인 한숨들을 글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들로 쏟아내고 있었는데 마침 그러한 때에 그 문장을 만난 것이다. 작가의 손을 떠난 글은 결국 독자 개개인의 상황과 감성에 따라 읽히기 마련이니 글 전체 맥락과는 다르게 특정 문장을 붙들고 울기도 한다. 이번주 내내 그 문장을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인 양 꼭 쥐고 있었다.


나는 AI가 아니다. 나는 맥박이 뛰고 뜨거운 피가 돌고 있는 사람이니까 충분히 어리석을 수 있는 것이고, 이러한 어리석음에 대해 같잖지도 않은 문장들을 쏟아내며 울고 불고 할 수도 있는 거고, 그러면서 조금씩 스스로를 위로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안했다.

어리석음이 글이 된다는 것. 이 어리석음의 모든 것들이 글이 되지 않아도 괜찮으니 여전히 그 문장을 손에 꼭 쥔 채 당분간은 뭐든 써보려 한다. 사실, 이제는 글이 뭐 별 건가 싶기도 하다.


돌이켜보니 아마도 '맘충'이란 단어가 시발점이 되지 않았나 싶다. 아닐 수도 있지만 지금은 그저 그 단어 탓을 해볼까 한다. 스타벅스 테이블에 기저귀를 올려두는 엄마, 식당에 갔을 때 아이가 먹을 음식을 서비스처럼 요구하는 엄마, 맘 카페에 자주 올라오는 '내 아이는 잘못이 없는데 저 집 아이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엄마. 그런 엄마들을 맘충이라 부르고 있었지만 실은 대부분의 엄마를 맘충이라는 말로 싸잡아 비아냥거릴 때, 어쨌든 나는 절대 저렇게 불리지 말아야지 다짐했었다. 그리고 그 맘충이 되지 않기 위해 아이에게 조금 엄했던 거 같다. 아니, 사실 '조금'은 아니고 꽤 많이.


얼마 전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아이가 탁자에 뭔가를 흘렸다. 깜짝 놀란 아이가 내 눈치를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움찔거리는 어깨가 안쓰러워 "괜찮아, 밥 먹어. 엄마 화 안내."라고 말해줬다. 평소라면 일하시는 분들 힘들게 이렇게 흘리면 되느냐며 한바탕 잔소리를 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모를 일은 아니고 확실히 그러고도 남았다. 화내지 않겠다는 말에 안심한 듯 수저질을 계속 이어가는 아이의 엉덩이를 토닥여주면서 그깟 맘충이 뭐라고, 하며 그제야 속으로 조금 비웃었다.

맘충 좀 되면 어때. 내 아들이 맛있는 음식을 맘 편하게 먹으면 될 일이었는데. 진작에 맘충이 돼버릴 것을 그랬네 후회했다.

심리상담을 해주신 분도, 담임 선생님도(너무 부끄러웠지만 검사보고서를 들고 담임선생님을 만나기도 했었다) 아이의 정서발달을 위해서는 감정카드 사용이 도움이 될 거라고 하셨다. 개별적인 상황과 감정을 연결시켜 이야기를 하다 보면 공감능력도 충분히 학습이 된다고 했다. 제주도 여행을 갔던 며칠 외엔 감정카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요즘이다.


어젯밤에 아이가 불쑥 "엄마, 내일 일하러 가?"라고 물어왔다.

봄이 되기 전까지 남편과 나, 둘 다 제법 바쁜 곳에서 근무했기에 주말에도 번갈아 가며 일을 하러 갔었다. 아이는 주말이면 교대로 일하러 가는 우리 때문에 엄마와 있거나 아빠와 있거나 했다. 나 오늘은 누구랑 있어?라는 질문을 자주 했던 것 같다.

"엄마랑 아빠 이제는 주말에 일하러 안 가. 둘 다 내일 너랑 있을 거야."라고 대답했더니 아이는 조금 안심한 듯한 얼굴로 "다행이다. 예전에 아빠는 일하러 가고 엄마가 나랑 같이 있을 때는 극혐이었는데... 엄마가 맨날 야단쳐서 아빠가 없을 때는 정말 싫었어."라고 했다.


아이가 공감능력이 없다는 얘기를 듣거나 친구들과의 대화 중에 뾰족한 말을 한다는 지적을 받는 경우가 이럴 때구나, 생각했다. 이런 말을 하면 상대방의 기분이 어떤지에 대해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가만히 아이를 바라보고 있으니 내 표정을 살피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화가 났는지를 살피는 거다.


우리 지금 기분을 카드로 이야기해 볼까?

감정카드를 펼쳐놓고 지금 기분을 골라보라고 했다.

아이가 고른 카드는 걱정과 무서움과 화남과 긴장, 힘듦과 졸림이었다.

왜 이런 기분이야? 했더니, 엄마가 화낼까 봐 무섭고 화나고 긴장되고 힘들다고 했다. 난 그냥 솔직하게 말한 건데 엄마는 왜 그러냐며 불안해했다.


나는 슬픔 카드를 골라 아이 앞에 꺼내 놓으며 "엄마는 지금 슬퍼. 네가 엄마랑 있는 것이 극혐이었을 정도로 엄마가 너를 힘들게 했던 것이 슬프고, 이제는 엄마가 변하려고 아주 많이 노력하고 있는데도 네가 아직도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어서 그것도 슬퍼."라고 말했다.


아이는 또 내가 화를 낼까 봐 무서운 것인지 "엄마, 지금 그렇다는 게 아니고 예전에 그랬다는 말을 하는 거야. 혹시 지금 화난 거야?"라며 재차 확인했고, 나는 아이가 학습한 감정은 이런 종류의 감정뿐이구나, 를 깨닫고 다시금 마음이 무너질 뻔했지만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엄마는 지금 화가 난 게 아니야. 그리고 앞으로 네가 잘 못한 일이 있을 땐 엄마가 화를 낼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건강하게 화낼 거야. 모든 감정은 다 소중한 거고 너랑 엄마는 앞으로 건강하게 그 감정을 느끼고 사용하는 방법을 연습해야 해.

엄마는 지금 슬픈 거야. 네가 극혐이라고 말해서 슬퍼. 사랑하는 사람한테 그런 말을 듣는다는 건 아주 슬픈 일이야. 더 이상 네가 극혐을 느끼지 않도록 노력하는 엄마가 될 거야. 그리고, 지금쯤 네가 느껴야 할 감정은 무서움이나 긴장, 불안이 아니고 미안함이야.

엄마가 너한테 극혐이란 말을 듣고 미안하고 슬프다고 했으니 너도 지금은 엄마한테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어야 하고 '아니야, 엄마, 그건 얼마 전까지 그랬다는 거고 이제는 안 그래.'라고 엄마를 위로할 수 있어야 해.

슬픔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거의 울 뻔했지만 울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감정은 다 소중하고 상황에 맞게 골고루 제대로 느껴져야 건강하다는 것을 아이에게 가르치고 있는 요즘이니 눈물이 나왔다면 아마도 자연스럽게 울었을 거다. 나는 요즘 잘 울고 잘 웃는다. 실수에 대해 후회도 하고 변화를 다짐하면서 건강해져 가고 있으니 아이도 그랬으면 좋겠다.


미안함 카드를 들어 보이며 극혐을 느끼게 해서 미안해,라고 했더니 아이도 이제 극혐은 아니야 엄마, 나도 미안해,라고 했다.


어리석음이 글이 된다는 것이 무언지 사실은 알지 못한다. 그날 그 문장이 왜 그렇게 나를 울렸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나의 어리석음은 그 아둔함과 후회조차도 치밀하지 못하여 부사도, 형용사도 얼마든지 비집고 들어올 틈이 많으니 행간에 감춰진 사랑과 걱정, 응원까지 모두 빠짐없이 글이 되어줬으면 좋겠다. 이렇게 쏟아내고 있는 나의 어리석음이 어쩌다가 글이라는 것이 되어 아이의 마음을 두드려주기만 한다면, 나는 나의 어리석음이 마냥 부끄럽지만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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