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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아라빌리 Sep 11. 2023

캠핑장에서 보라카이 생각하기

산청 별천지 캠핑장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 어째서 그 누구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던 걸까.

아침에 일어나서 맥주 캔을 따면서 잠시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멍하니 있어도 된다고? 초콜릿을 안주 삼아 맥주 500ml를 마시는 동안 주변이 풀벌레 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취기가 차오르는 만큼 찌르르르, 풀벌레 소리들이 시원한 바람과 함께 차올랐다.

좋은데? 생각보다 꽤 괜찮은데? 맥주를 홀짝거리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자기야, 나 아무것도 안 해서 지금 너무 좋아."

남편이 듣든 말든 하늘을 향해 중얼거렸다. 팔다리에 힘이 빠지며 조금씩 나른해져 가는 느낌도 좋았다.  


캠핑을 시작했다. 남편이 몇 년째 캠핑 타령을 하고 있었지만, 벌레와 습기와 생각만 해도 불편할 것이 뻔한 화장실 때문에 내내 모른 척하던 일이었다. 지난달에 "캠핑 장비... 그냥 구경이라도 해볼래?" 하는 말에 따라나섰다가 충동적으로 텐트를 사버린 것이(내가 아니라, 남편이) 시작이었다. 남편이 사들이고 있는 캠핑 장비가 점점 창고를 채우고 있었고 이러다 안 되겠다 싶어 창고 하나를 아예 비워내고 나니 어머, 캠핑이네! 그제야 실감이 났다. 그리곤 어쩌고 저쩌고, 얼렁뚱땅 쿵쾅쿵쾅 하다 보니 이번 주말엔 산청 캠핑장에서 새소리에 잠이 깨선 아침부터 치이익- 하며 맥주캔을 따고 있었던 것이다.


캠핑장으로 오는 길엔 남편이 브런치의 글에 대해 물어왔다. 최근 남편을 주제로 한 브런치북을 발행한 후로 종종 내 글을 보고 있는 거 같다. 화장실에서 보기 좋다고 했다. 칭찬처럼 들리진 않는다.  

"너는 너한테 댓글 다는 사람들 글 다 봐?"

"다 보지. 내가 보고 싶은 글만 구독하니까. 아, 유튜브처럼 여기도 구독이라는 시스템이 있어. 암튼, 근데 지금은 그냥 쓰는 거 자체가 좀 재미가 없어졌다고 해야 하나? 잘 모르겠어."

"왜?"

"쓰고 싶은 건 다 썼어. 그리고 써 봤자 어차피 아무도 안 봐. 내가 쓴 글은 나조차도 안 봐"

"왜?"

"너무 과하니까. 그냥... 나는 좀 뭔가 과해. 과해서 구려."

"그럼 다른 거 써 봐. 소설 같은 거 써 봐."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내가 한 10년 전부터 소설이 쓰고 싶었거든?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긴 해. 근데 이렇게 과한 상태로는 어차피 아무것도 못 써. 여전히 구린 글일 뿐이야."


아침부터 빈속에 맥주를 마시니 알딸딸해졌다. 알딸딸해진 김에 전날 남편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려봤다. 소설을 쓰고 싶은데 써봤자 구릴 것 같다. 안 봐도 벌써 구릴 듯해서 맥주를 더 삼켰다. 벌써 몇 달째 첫 문장을 생각하고 있지만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있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처럼 엄청난 문장을 쓰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런 문장은 톨스토이가 환생하거나 나스카 라인을 그린 외계인이나 되어야 쓸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최근 제인에어를 다시 읽고 있는데 제인에어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그날은 산책을 하게 될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예사로 읽혔을 글들이 이제는 다르게 다가온다.

그날은 어떤 날이지? 대체로 종종 산책을 하는 생활이었나? 산책을 하지 않게 된 이유는 뭘까? 산책 대신 뭘 하게 된 걸까? 그래서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아! 가능성이 없었지만 하게 되었다는 걸까? 적어도 이 정도의 궁금증을 품고서 다음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첫 문장을 쓰고 싶은데...라는 생각을 하다가 에라, 제인에어도 그냥 외계인이 쓴 건가 보다, 하며 체념했다.


가지고 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집에서 출발하기 전에 장강명의 '5년 만에 신혼여행'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 맥주를 마시며 그 책을 펼쳐서 읽기 시작하니 남편이 옆에서 한마디 거든다.

"또 그 책이네. 이번에도 다 못 읽겠네?"

"아니야, 오늘은 다 읽을 수 있어. 어차피 여기선 책 읽는 거 말곤 할 일이 없거든?"

"그 책, 몇 년째 읽고 있는 거 같은데?"

"그니까. 오늘은 끝을 낼 거야."

책은 작가의 아내와 혼인신고 후 5년 만에 다녀온 보라카이 여행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상하게 잘 읽히질 않아 몇 년째 식탁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었다. 드문 드문 생각날 때마다 읽고 있어 앞에 읽었던 내용이 기억나질 않았다.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만 가득한 곳에서 아무 할 일이 없이 맥주나 마시며 다시 처음부터 읽기 시작했다. 막상 읽기 시작하자 이렇게 술술 잘 읽히는 책을 왜 몇 년간 식탁 위에 내버려 뒀나 싶었다. 책을 읽다 보니 항공권이 취소된 후로 흘러갈 곳을 찾지 못해 어딘가에서 방황하고 있을 우리의 보라카이 여행이 떠올랐다.


지난 5월에 충동적으로 에어아시아의 보라카이 항공권을 구입하곤 숙소까지 예매해 뒀는데 돌연 항공권이 취소되었다. 리조트 측에 항공사의 결항확인서를 보내며 사정해 보았지만 취소불가라는 답변이 돌아올 뿐이었다. 예약할 때 취소불가 조건임을 알았지만, 발코니에서 수영장으로 바로 이어지는 룸이 3박에 70만 원이면 꽤 매력적인 듯하여 덜컥 예약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11월 말에 부산에서 보라카이로 가는 항공편이라곤 마닐라를 경유해서(7시간 공항에 있어야 한다) 12시간에 걸쳐 보라카이로 가는 필리핀항공뿐이었기에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잠시 보라카이를 잊고 있었다.


"우리 그냥 70만 원 날렸다고 생각할까?"

남편한테 이 질문을 벌써 몇 번째 던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미 날리는 쪽으로 맘이 기울었지만 남편의 뜻을 묻는 척 슬쩍 던져 보는 것이다. 늘 그렇듯 남편은 그냥 피식 웃기만 한다. 내가 가지 말자고 하면 그러자고 할 테고, 내가 가자고 우기면 그건 또 그거대로 그러자고 할 테지.

에어아시아에서 항공권을 구입했을 땐 남편과 나 그리고 아들, 3인 직항 항공권이 100만 원 정도였다. 헤난 프라임 리조트는 3박에 70만 원.

지금 현재 유일한 항공권인 필리핀 항공은 마닐라 경유인데도 170만 원이다. 70만 원이나 더 주고 마닐라까지 경유해서라도 보라카이를 갈 것인가. 숙박비 70만 원을 날리고 보라카이에 가지 않을 것인가.

보라카이 여행이 그 70만 원만큼이나 즐거울까? 우리 가족한테 그 돈은 너무 큰돈인데, 70만 원어치의 행복이라... 게다가 에어아시아는 아직 항공권 환불도 안 해주고 있다. 환불받을 수 있긴 한 걸까.


"헤난 프라임 사진을 봤는데 식당에서 화이트 비치가 바로 이어져 있는 거야? 내가 그 사진만 안 봤더라도 거기 예약 안 했을 텐데... 이렇게 세게 발목 잡힐 줄이야."

남편은 계속 웃기만 했다. 보니까 내 말을 안 듣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이 이야기는 이미 너무 많이 했다.

"나 말이야, 보라카이 여행 후기랑 숙소 후기를 너무 많이 봐서 벌써 보라카이에 다녀온 거 같아. 석양은 이미 지루할 정도고 망고 빙수도 토하도록 먹었고 산미구엘 맥주는 너무 많이 마셔버려 진작에 숙취에 시달리고 있달까. 보라카이에 가면 스쿠버 다이빙을 하면서 니모를 볼 계획이었는데 이미 니모랑 먹방 유튜브까지 찍은 느낌이야."

남편은 계속 딴짓 중이었지만, 그러든지 말든지 계속 말했다.

"이 책 작가는 세부퍼시픽을 타고 보라카이에 갔나 봐. 8시간 연착 되었네? 되게 운 좋다, 그치? 우린 아예 결항인데... 필리핀 항공도 11월 중순 이후까지 운항 중단이야. 에어부산은 동계 운항 스케줄에서 보라카이가 빠져있어. 이제 아무도 보라카이는 가지 않는 걸까? 난 왜 보라카이가 가고 싶었을까. 가기도 전에 이렇게 질려버릴 거면서."


그러다 잤다. 맥주를 마시고 나니 잠이 밀려들었다. 후기에서 본 보라카이 파도처럼 밀려드는 구만, 생각했다.

아들이 옆에서 닌텐도 게임을 하다가 내 손을 만지작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부드러운 느낌이 좋았다.

일어났을 땐 이런 하늘이 보였다. 불어오는 바람 사이로 풀벌레 소리와 매미소리가 좀 더 커져 있었다.

캠핑을 오기 전에 우연히 마주하게 되는 하늘과 초록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하도 많이 들어서 이미 '다 아는 맛'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막상 마주하게 되니 잘 몰랐던 거 같기도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여유와 물 흐르듯 이어졌던 고요한 낮잠과 어린 시절의 동요 속에서나 존재할 것 같은 솔솔 불어오는 바람과 초록의 자그마한 일렁임은 내가 잘 모르는 것들이었다. 그대로 누워 멍하니 바람과 햇살과 그 사이에서 나부끼는 초록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그 실체는 상상과는 조금 다른 감각이었다. 다시 보라카이를 떠올렸다. 보라카이 석양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거대한 느낌이려나. 그곳의 저녁 하늘은 내가 알던 것과는 다른 채도의 빛깔로 물들어갈까. 공기의 질감은 완전히 새로운 감각일까. 니모가 코끝을 스치면 어떤 기분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하자 어쩌면 70만 원어치의 행복을 찾는 것이 생각보단 어렵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보라카이에 가자고 해야겠다. 낮잠에서 깨어날 때쯤 결심을 했다. 마닐라 공항을 경유하든, 인천 공항을 경유하든, 보라카이에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혹시 아나? 새로운 감각이 열리든, 외계인을 만나게 되든, 니모한테 귓속말로 전해 듣든, 다음 문장으로 이어질 수 있는 소설의 첫 문장도 만나게 될지.

뭐든 상상과는 조금 다른 법이니 일단은 마주하고 볼 일 아닌가. 이전까진 내 안에 없던 어떤 여유가 생겨난 기분이었다. 역시 뭐든 겪어볼 일인가 보다. 캠핑도, 보라카이도, 어쩌면 소설까지도.

+ 캠핑장비로 300만 원을 넘게 지출했는데 우리 텐트가 가장 어둡고 구렸다. 이건 마치 내 글 같구먼. 가여운 내 마통 잔고 ㅠㅠ 하며 잠시 울었는데, 이 사진 한 장으로 충분해졌다. 이 정도면 300만 원이 훨씬 넘는 행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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