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형계의 성골

by 날아라빌리

MBTI 이전에 혈액형이 있었다. A형은 침착하나 조금 소심한 편. B형은 다소 제멋대로인 편으로 특히 남자가 B형인 경우는 나쁜 남자일 확률이 높음(그러나, 여자들에겐 인기 많음). O형은 밝고 모난 데 없이 둥글둥글함. AB형은 천재 아니면 바보, 혹은 정상 아니면 또라이. 딱 이렇게 4종류밖에 없어서 기억하기 쉬웠다. 직관적이고 간결했던 기준 덕에 활용도도 높았다. 쟤는 A형 같아, 얘는 딱 봐도 B형이네,라는 추측들이 제법 들어맞기도 했기에 혈액형 세대들에겐 나름의 통계를 바탕으로 한 정확도 높은 성격 테스트였다.

나 또한 그 혈액형 세대이다. 우리 때는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이제 막 호감이 생기기 시작했을 때, 혹은 '저거 좀 또라이 같은데' 싶을 때는 혈액형을 묻곤 했다.


혈액형 뭐예요?

B형이요.

어? 그렇게 안 봤는데, 나쁜 남자구나?(나쁜 남자의 '나쁜'은 통상적인 의미의 '나쁘다'가 아니었다.)

아 그래요? 하하핫.


혈액형 뭐예요?

O형이요.

앗, 그럴 줄 알았어요.

아 그래요? 하하핫.


혈액형 뭐예요?

A형이요.

어머, 소심해 보이진 않는데? 차분한 성격인가 보다.

아 그래요? 하하핫.


그러나, AB형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아니, 나만 그랬던가. 암튼 나는 저런 상황이 아니었다.


AB형이지?

앗! 어떻게 알았어?

그럴 것 같더라.

왜?

어... 그러게.(머뭇머뭇)


나는 AB형이에요.

아......(탄식) 어쩐지.....

.... (조금 어리둥절)(왜냐고 묻고 싶지만, 괜히 주눅 들어 묻질 못함)


나는 대체로 저랬다. "아, 어쩐지......"라는 반응이 이어질수록 그 '어쩐지' 속에 담긴 나의 모습과 '......' 안에 감춰진 속내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론 나야말로 어쩐지, 그러니까 정말이지 어쩐지, 묻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아서 상대가 '어쩐지......' 하는 눈빛을 보일라 치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그 '어쩐지......' 속의 AB형이 아닌 척 살아가려 할 뿐이었다.

남편을 만나 결혼 이야기가 오고 갈 무렵 남편이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어머니를 만나면 혈액형을 사실대로 말하지 말자고. 내가 AB형이라는 사실을 속이자고 했다. 장난인 줄 알았는데 진심이었다. 어머니를 못 살게 군 사람 중에 AB형이 있었다나 어쨌다나. AB형의 변덕스러움과 감정기복을 아주 싫어한다고 하셨다.

그럼 뭐로 해?

AB형만 아니면 돼.

명문대 출신인 척, 재벌집 딸인 척하며 신분을 속이자는 것도 아니었으니, 굳이 어머니의 옛 상처를 건드릴 필요는 없겠다 싶어 첫 만남에서 혈액형을 물으실 때 A형이라고 했다. 나는 어머니께서 싫어하는 AB형 특유의 변덕스러움과 감정기복을 아주 제대로 갖춘, AB형 중의 AB형, 상위 1% AB형이기에 우리 어머니께선 A형 중에서도 AB형 같은 애가 있구나, 하며 의아해하셨을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결혼한 지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내가 A형인 줄 알고 계신다. 지금도 종종 AB형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며 그 밉살스러움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시는데, A형인 척하고 있지만 실은 AB형계의 성골인 나는 그저 송구스러울 따름이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어 MBTI라는 것이 유행하고 있는데도 우리 어머니에겐 여전히 믿고 거르는 AB형인 것이다.


나는 예민하다. 감정기복도 심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이 너울거린다. 때로는 거센 파도가 치듯 철썩이며 울렁거려 멀미가 날 것 같은 날도 있다. 가뜩이나 혼자 있길 좋아하는데 그런 격동의 하루를 보낸 날이면 더욱더 고요한 심해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한다. 당연히, 인간관계에서의 주특기는 잠수이다. 게다가 변수에는 한없이 약하다. 변수라는 것이 내 앞에 나타나기만 하면 망설임 없이 쌍무릎부터 꿇는다. 그냥 못 본 척 지나가주세요. 저번에도 우리 만났잖아요. 불쌍하니까 이번엔 좀 살려주세요. 그야말로 백전백패다. 나라는 사람은, 융통성이라곤 개미똥구멍만큼도 없어 내가 상상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다 고려하다가(그러나, 대체로 내가 패배하는 결론이다) 결국은 도망갈 구멍부터 찾는다. 확실히, 일반적인 의미의 '좋은' 성격은 아니다. 우리 어머니가 믿고 거를 만한 딱 그런 종류의 성격이긴 하다.

다만, 내가 억울한 것은 그 혈액형의 시대만 해도 말이다...... 예민하고 내향적인 성격은 어딘지 모르게 도덕성과 결부되는 경향이 있어 성격이 '드럽다'로 결론 나곤 했다. 좋은 성격은 아니다, 까진 인정할 수 있어도 '드러운'성격인 것까진 인정하기 힘들어서 최대한 예민하지 않은 척, 피곤한 타입의 인간은 아닌 척, 알고 보면 쿨한 구석도 코딱지만큼은 있는 척하려고 애썼다. 혈액형 시대의 화법으로 말하자면 살짝 O형인 척했달까. O형을 흉내 내며 살았달까.


내가 AB형계의 성골이라면, 우리 남편은 O형계의 성골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인간은(어머? 나 왜 화났지?) 매사가 온통 '그러려니'다. 그 망할 놈의 '그러려니'를 상당히 거북해하는 나로선, 남편의 찐 'O형력'을 마주할 때마다 간신히 숨기고 있던 나의 찐 'AB형력'이 드릉드릉거렸다.

야아! 세상 일이 전부 그렇게 그러려니로 퉁쳐지는 게 말이 돼? 질서는 맨날 지키는 놈만 지키고, 일은 하는 놈만 하는데, 요령 없다는 비웃음까지 당해야 해. 악당은 언제까지나 악당이고, 히어로는 천날만날 지구 지키느라 바빠서 애인한테 차이기만 하는데 뭔 빌어먹을 그러려니야. 보통의 기준이 제각각이듯 그러려니의 기준도 제각각인데 매번 그렇게 저마다의 그러려니로 퉁쳐버리면 북극곰은 누가 살리고, 지구 온도는 언제 낮추냐고.

......라는 소리를 해봤자, 진지충 혹은 역시 AB형 소리만 듣기 일쑤였다. 아, 지친다. 그래. 너무 긴말을 했다. 요약하자면, A형이라고 뻥치고 다니던 AB형이 O형 흉내를 내보려 했지만 처참하게 실패했다는 소리다.


숨이 안 쉬어지기 시작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하늘이 무너지는 걸 겪어본 적은 없지만)

나는 변수를 너무도 두려워해서 적어도 '나'라는 존재만이라도 변수에 노출되지 않게, 통제 가능한 범위에 두려고 애를 쓰며 살아왔다. 내 배로 낳은 내 아들조차 내 맘대로 할 수 없지만, 그래서 내겐 너무나도 큰 변수로 존재하고 있지만, 적어도 '나'는 '나'니까 '나'의 통제 안에 두어서 변수의 눈에 띄지 말아야지. 언제나 그런 마음으로 조심하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너무나도 커다란 변수와 마주친 것이다. 내 호흡인데 내 마음대로 안 되다니.

왜? 왜? 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쩜 이렇게 기막힌 일이. 내가 녀석한테 뭘 그리 잘못했다고. AB형계의 성골인 나의 'AB형력'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쓰으벌, 덤벼라 세상아.


그렇지만, 또 내가 내향인계의 성골이다. 당연히 나의 세상은 좁디좁아 세상이라고 해봤자 남편과 아들뿐이었다. 손오공이 원기옥을 끌어모으듯 폭발적으로 끌어올린 나의 'AB형력'과 그로 인한 분노는 남편과 아들에게 쏟아져내렸다. 봄부터 소쩍새가 울길래 나도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된 건데!!!

네가 나한테 그렇게 하지만 않았어도!!!

지금 누가 누구한테 병원을 가보라는 거야?

감히, 진짜 감히, 누가 누굴 정신병자 만들고 있어?


그렇게 소쩍새가 울었고, 나도 울었다. 소쩍새가 울음을 그치기까지 우리 집은 전쟁터였고 O형계의 성골인 내 남편조차 꽤나 힘들어했던 시기였다. 얼마 전 남편이 그때는 나도 못 버틸 뻔했어,라고 가만히 고백하길래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며 꼭 안아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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